엔딩 크레딧 - 빨간 마후라 신영균의
신영균 저자, 박정호.김경희 정리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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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명보극장에서 영화가 개봉했을 때 <빨간 마후라>의 인기는 대단했다. 서울 명보 매표소부터 늘어선 관객 줄이 을지로 상가까지 이어졌다. 그때가 바로 '암표'라는 게 탄생한 시점이라고 말할 정도다.관객 25만 명을 동원하면서 그해 흥행 1위작이 됐다. 당시 서울 인구가 100만명이었으니 서울 사람 중 4분의 1이 영화를 본 셈이다. (-24-)


<연산군> 연작에 대한 나의 애착은 남다른 편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은 흔히 연산군을 폭군이라고 비난하지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연산군은 폐비 윤씨에겐 효심 지극한 아들이었다. 사약을 받으면서 비단 한삼에 피를 토하고 돌아가신 어머니,이 '금삼의 피'를 보고 연산군은 복수심에 타오른 것이다. 나는 폭군읻자 효자였던 연산군의 양면에 매력을 느꼈다. (-88-)


내 최고의 영화 <빨간 마후라>에서는 내가 편대장 조종사인 나관중 소령을, 최무룡이 후배 조종사인 배대봉 역을 맡았다. 나는 각별한 동료 조종사였던 노도순(남궁원)이 전사하자 그 부인 지선(최은희)을 배대봉과 연결해 준다. 나 소령은 자신이 똑같은 아픔을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후배들을 대신해 위험한 임무 수행에 나섰다가 결국 목숨을 잃는다. (-176-)


남궁원과 윤일봉은 2020년 올해 여든 여섯으로, 1934년생 동갑내기다. 두 배우에게는 똑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충무로의 살아 있는 전설' ,'한국영화의 산증인'이다. 물론 내게도 통용되는 말이다. 한때 충무로를 제 집처럼 휘저었던 '사나이 3인방'이라고 할 수 있다.이제 1960년 ~1970년대 한국영화를 증언할 수 있는 배우도 우리 셋만 남았다. (-240-)


안성기는 배우 경력만 놓고 보면,사실 나의 선배뻘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만 다섯 살 때다. 나보다 3년 먼저 충무로에 발을 들였다.김기영 감독과 대학 시절 함께 연극을 한 아버지 안화영 씨의 손을 잡고서다. 영화배우이자 영화제작자로도 활동한 안화영 씨는 2019년 초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는데, 젊은 시절 나와 함께한 작품은 거의 없다. (-342-)


한국 영화의 역사, 그 역사의 시간들이 어느덧 유수같이 흐르고 있었다.한영화배우  사람 한사람 세상을 떠났고,충무로의 원로는 이제 신영균, 남궁원, 윤일봉 이렇게 셋 남았다.배우계의 원로라 할 수 있는 1935년생 이순재 조차도, 책을 쓴 신영균보다 나이로 치면 아래였으며, 1927년생 송해 다음이 배우 신영균이다. 배우 신영균은 빨간 마후라로 알려졌으며, 감독 신상옥과 함께 한 작품이 상당히 많았다.빨강 마후라도 신상옥, 신영균,최무룡, 최은희,윤인자이 함께 출연하였다. 이 책에서 눈여겨 보았던 대목은 신상옥과 최은희의 월북 이야기다. 두 사람은 박정희 정권 때 북한으로  월북하였으며, 신상옥 감독은 그로 인한 휴유증을 안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책에 나오는 배우들은 한때 전성기를 지나온 이들이었다.1990년대 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를 주름잡았던 그들의 삶과 영화 이야기,그리고 가족사들까지 일목 요연하게,영화배우 신영균의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었으며, 영화 빨간마후라로 성공을 거두었던 1960년대 한국의 영화 인프라와 한국 영화의 역사를 두루 살펴 볼 수 있다.특히 고인이 된 과거의 충무로 배우들과 그들의 뒤를 잇는 2세들의 이야기는 익숙함과 낫설음 그 자체였다. 이예춘-이덕화-이지현으로 이어지는 연예계의 계보, 박노식-박준규, 하장강- 허준호,최무룡-최민식 등등 많은 이들이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가 영화계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즉 지금 헐리우드게에서 인정하고 있는 한국 영화의 전성기 이전에 1960년대 한국 영화의 현주소를 이해할 수 있으며, 영화 배우 신영균과, 사업가 신영균의 엔딩 크레딧, 그의 꿈과 삶의 궤적을 두루 살펴 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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