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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론강
이인휘 지음 / 목선재 / 2020년 10월
평점 :
찬미는 녹두전을 가위로 잘라 접시에 담아놓고 이쑤시개를 하나씩 꽂아놓았다. 그리고 부침개를 부치다가 멀리서 트럭이 나타나면 접시를 들고 트럭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운전석에 기사 얼굴이 보이면 그녀는 허리를 쭉 펴고 손을 들어 특유의 손가락 춤을 추면서 그들의 눈길을 끌었다. (-35-)
찬미는 한믈색 라운드 반팔 티에 파란색 등산주끼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발목까지 올라온 등산화는 모자 색깔처럼 밤색이었고 필름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들이 달린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목에 건 사진기를 흔들거리면서 성큼성큼 걸어오다가 모자를 벗으며 느티나무 그늘 안으로 들어왔다. (-98-)
어쩌면 모든 것이 예견돼 있던 일만 같았다. 폐차장 같은 산동네에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도 ,문학을 사랑했던 선생님만 만나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흐르진 않았을 것 같았다. 원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랬더라면,이랬더라면 , 어머니의 죽음이 떠오를 때마다 변명의 꼬리처럼 붙이며 후회했던 '만약에' 를 또다시 생각 앞에 매달고 있는 자신이 어리석어 보였다. (-150-)
"나, 창녀 아니에요. 아저씨가 외로워 보여서 그런 거지."
그녀는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알록달록한 사탕을 빨면서 소주병에 남은 술을 다 따랐다.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아저씨 얼굴에 쓰여 있네요. 난 시시한데." (-223-)
시에 스며 있는 원우의 마음을 보며 찬미는 뜨겁게 이글거리며 다가왔던 그와의 여름날을 기억했다. 이제 그의 노트 안에 가득 들어 있던 칙칙한 절망과 체념의 언어는 지워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쓰인 시에 묻어 있던 죄책감과 눈물들도 가라앉고 있었다.그의 시가 따뜻한 온기를 품고 다시 태어나는 게 느껴져 찬미는 몇 번을 다시 읽었다. (-325-)
남한강과 섬강이 합수되는 지점에 홍호리가 있었다.홍호리는 원주시 부론면 홍호리이며, 이 소설의 배경이기도 하였다. 소설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메시지,그 안에서 저자의 생각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소설은 그런 것이었다.어머니의 예고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하여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주인공 원우, 그런 원우를 우연잏 알게 된 임찬미, 두 사람은 조금씩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소설은 지극히 한국적인 배경을 장소로 하고 있으며, 원우는 찬미의 뒷모습을 , 찬미는 원우의 두시모습의 쓸쓸함을 발견하고 있었다.녹두전을 빚는 찬미와 원우의 만남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서정적이면서, 무언가 음울한 분위기. 원우의 습작처럼 쓰여진 시는 찬미의 눈에 들어왔고, 찬미는 그 과정에서 원우를 더 알아가고 싶어한다. 원우의 죄책감 뒤에 숨겨진 절망감. 예쁜 얼굴에 녹두전을 빚는 찬미의 묘한 모습들, 남자들에게 서슴없이 다가가는 찬미의 그런 모습들,원우는 무언가 거리를 두고 싶어 하면서도 점점 더 다가가게 되는 것은 서로가 간직하고 있는 이끌림 속에 채워지지 않은 공허감 때문이었다. 칙칙함과 절망과 체념의 언어,그것은 원우의 시에 투영되었고, 그안에서 찬미는 원우의 내면속 불행을 읽고 있었다. 즉 이 소설에서 느껴지는 메시지들, 주인공의 모습 한 켠에 감춰진 슬픔은 그 무엇도 채워지지 못한 것이었다. 산과 강이 있는 우너주의 부론강을 배경으로 하여,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것처럼, 남(원우)과 여(찬미)가 서로 만나서 원우의 내면 속 죄책감을 용서하는 것 , 그것이 원우의 삶을 위로하고, 찬미가 원우에게 다가가게 된 또다른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