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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백 마리
정선엽 지음 / 시옷이응 / 2020년 8월
평점 :
"이경미라고 혹시 알아? 우리 과 선배 ,꽤 유명한 영화도 하나 있던데? 상도 좀 타고.그 사람이책도 써냈더라. 재주도 좋지. 근데 제목이 뭐였더라."
남자는 깊은 우물 속에 보란 듯이 호기롭게 던져 넣은 두레박이 끈이 조금 모자라서 낭패인 사람마냥 잔뜩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끙끙댔다. (-11-)
여자는 꼭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입을 것같은 유니폼 차림을 하고 있다. 상의는 네이비 컬러의 블라우스고 하의는 옅은 아이보리 느낌의 코튼 스커트.선은 정확하게 무플 위까지였다. 그다지 튀지 않고 심플한 도트 패턴의 실크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어떻게 보니 항공사 승무원 같기도 하다. (-37-)
"안아줘."하고 유나가 일곱 살 아이와 같음 목소리를 내며 양팔을 벌렸다. 꼭 끌어안아주었다. 모자란 부분이 생기지 않도록.
윗배 쪽으로 젖가슴이 밀착되어 닿는 감촉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웬일로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고 팽팽하게 서는 느낌이었다. (-92-)
두 사람이 강변을 걸었다.
"생계를 유지할 만큼 돈을 벌지 못하면 직업이 아니야.그냥 취미인 거지."
"그만큼이 얼마큼인데?"
"한 삼백?"
"너무 많은 거 아냐?"
"실은 사백만 원이라고 말하려 그랬어." (-125-)
그러나 강변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카페는 분위기라든지 실내장식이 멋스럽긴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할 만한 요소들이 적지 않을 것 같았다.좀 더 안쪽으로, 강변과 떨어져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작은 공터를 지나 계단이 나왔고 나는 거기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하나씩 계단을 밟아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174-)
망각되어졌다. 작가 정선엽에 대해서도,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망각되어졌다.그러나 공교롭게도 그가 남겨놓은 소설 네 편중 <동숭동 인간>을 제외하고, <빨간머리 소년을 찾아서>,<비야 다오스타>를 읽게 되었고,세번째 <양 백마리>를 읽게 된다. 보편적으로 소설가 정선엽의 문학은 대중들에게 팔리지 않는 문학을 추구하고 있었다. 일상을 관찰하면서, 사변적이면서,잡기에 능하지만, 정석에 따르지 않는 실험적인 문학, 소위 독자를 헤아리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문학을 추구하고 있었다.물론 앞선 두 편의 문학도 그러하였고,이번 <양 백마리> 또한 그러하다. 팔리지 않지만, 한 번 읽으면,그 책 제목은 꼭 기억나는 문학,그가 추구하는 문학적인 특징을 향유하고 있다.
소설 <양 백마리>는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은 문학이며, 그것도 초단편 29편이 수록되어졌다. 꿈 속에서 양 백마리를 세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 각각의 단편들은 각자 다른 형태이며,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은 채 모래처럼 수평적이면서, 섞이지 않는 묘한 특징을 간직하고 있으며, 가벼움 속에 묵직함이 느껴진다.
돌이켜 보면 그렇다. 작가의 문학적인 가치관은 가볍지만 가볍지 않았다.우리의 일상 모든 것이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작가 정선엽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보게 된 어떤 장면하나,어떤 사건 하나가 초단편 소설이 될 수 있는 개연성을 제시하고 있으며,그걸 우리는 실험적인 문학이라고 언급하고 싶어졌다. 한편 이 소설에서 저자는 자신의 욕구,이성에 대한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허구에 가깝지만 결코 허구가 아닌 누군가의 심층적인 삶이었고, 그 삶을 관찰하는 2인칭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소위 현실에서는 잘 드러내기 힘든 부분들을 문학적인 힘을 빌려서 노출시켜 나가고 있으며, 저자의 가치관과 사유를 읊어 나가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