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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
이한칸 지음 / 델피노 / 2020년 9월
평점 :
눈은 자신이 내린 자리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망쳐놓거나 흩뜨려놓는 일이 없다. 그저 그 위로 내려앉아 덮을 뿐이다. 오직 그 자리에서 온 몸을 다해 지켜내다가 봄이 오면 사라진다. 마치 처음 왔던 때를 기억하는 것처럼, 또한, 내려앉은 후에는 그 위에 남겨진 흔적이나 발자국을 쉽게 찾아낼 수 있게 한다. (-9-)
산에는 유독 새소리가 많이 들리는 법이다. 아카시아 나무가 길게 하늘 높이 뻗어 있었다. 미맘때면 피어나는 아카시아꽃은 바람에 떠밀린 진한 향기를 코앞에서 뿜어냈다.청명한 기운이 하늘까지 다채로울 것 같은 맑고 푸른 산이었다. (-84-)
"고모 말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내 동생이지만, 하는 짓 보면 내가 다 부아가 치밀어올라. 너희도 이제 성인이잖아.그 새끼랑 부모와 자식간으로 계속 살아야겠니?" (-160-)
훗날 언니는 29살에 결혼을 했는데 신혼집 선반에 그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둔다고 그 장난감 몇 개를 가지고 갔다. 그때는 빚이 많이 줄어 거의 끝나갈 때였다. 다만 언니의 결혼식에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할머니의 장례식 이후 처음으로 우리에게 연락한 아버지는 결혼식 일주일 전에 갑자기 깁앞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 와중에 좋은 정장을 하나 맞춰달라고 했다.언니는 백화점에서 200만 원쯤 하는 옷을 맞춰줬고 나는 십만원 하는 벨트를 사드렸는데 ,아버지는 구두가 낡았다며 고급 구두까지 고르고는 계산대에 올려뒀다.그러고는 또 비아냥 거리듯이 말했다. (-200-)
언니의 신혼집과 우리 집은 비밀번호가 똑같았는데 335379 였다.그 번호는 우리가갚아낸 빚에 0 세 개를 뗀 숫자였다.바람이 찼다. 날이 추워지고 있었다.우리는 굳이 고생했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255-)
세상에는 다양한 부모가 있지만, 크게 두 부류로 나뉘게 된다. 자녀들에게 애틋하고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부모가 있고,저녀만 낳았지,부모 구실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소설가 이한칸님의 <흰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는 바로 후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에세이처럼 느껴지는 ,우리의 사회 현실을 성찰하게 해주는 소설이다. 즉 비현실적인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주인공은 연년생 언니가 있었다.중학교 전교 1등하는 언니와 함께하는 여동생,언니 덕분에 ,시험에서 선생님의 배려가 있었고,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 학교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달랐다.
가난과 빈곤에 쩔어 있었다. 언니의 삶과 여동생의 삶,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고, 슬픔과 아픔으로 침천해 있었다.부모의 사랑이 아닌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얻게 된 주인공은 나름대로 학교에서 적응해 나가지만, 번번히 부모의 빈자리,사랑과 연민이 부재한 삶을 의식하게 된다.
아버지가 아닌 아비였다. 사채 이자를 써서 갚지 못하는 상황, 그 빚은 온전히 자녀 몫이 되었다. 언니와 주인공이 29살 되던 그 때까지 빚에 쪼들리면서, 살아가고 있었다.그럼에도 아비는 자신의 체면을 차리고 싶었다.언니의 결혼식에 자신이 입을 정장 하나를 요구하면서,도리어 아비로서,자녀들을 타박하게 된다. 즉 이 소설은 가난과 빈곤이 우리 삶을 어떻게 편애하게 되는지 살펴 보게 되며, 추억과 낭만처럼 느껴지는 그런 가난은 없었다. 자신에게 사랑을 되물림해 준 할머니의 사랑이 소멸되었고,그 과정에서 고모의 이기적은 속물 근성이 나타나고 있었다.아버지는 있지만, 없는 것이 더 나을 정도였다.생색내기 바쁜 부모의 현존감, 그럼에도 이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있다. 모든 비극을 눈이 덮으면서, 고요하고 ,평온한 채 ,아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