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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회의 미
김선화 지음 / 북나비 / 2020년 7월
평점 :
안방에서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우렁차면 아버지는 외로 꼰 새끼줄에 숯과 실한 고추를 꿰어 사립문 양쪽 기둥에 매었다. 어쩌다 딸이 태어나면 솔가지도 꽂았다.그것의 신호를 알아차린 이웃에선 세이레 동안 마실오는 이가 없었고, 동냥하는 사람들도 비켜서 다녔다. 토방 한쪽엔 동생들의 빨랫감과 구분되는 어머니의 속곳이 치마폭에 싸여 나와 붕긋하고, 어머니와 언니가 부엌을 오가며 부산했다.나는 항상 언제 저지레를 할지 모르는 천방지축들을 건사하기 바쁘고, 마치 관찰자라도 되는 듯 오며 가며 집안의 동향을 살폈다. (-18-)
도시에 대한 동경을 막연한 아름다움으로 채워온 것은 아니지만,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환경은 나를 번번이 놀라게 했다.생활 식수보다 더한 불편요인이 화장실 사용이었다. 먼 데 까지 걸어가서 돈을 내야 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장 안의 숙련된 기술자들은 점심시간 외엔 퇴근 시까지 거의 자리를 뜨지 않았다. (-78-)
몸을 한껏 구부려 고부장한 노인과 깊은 포옹을 했다. 아침부터 서둘러 열차를 타고 찾아간 조치원역 인근의 조용한 요양병원에서였다. 친정 동네 이웃의 어른으로 돌아가신 내 어머니보다 다섯 살이나 위인 분인데, 거동이 어려워져 요양기관에 모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 근 1년 만이었다. 오래전 그 댁 아들 내외가 꽃나무를 재배해 살림을 불려, 마을에서는 그 안노인을 '꽃집할머니'라 불러왔다.우리집에 우환에 따라 어머니가 아버지 병실에 매여 계실 때는 사십 중반으로 늦동이를 낳은 큰 올케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그 댁에 맡기고 들일을 나가기도 했었다. (-145-)
새로이 단장된 시골집엔 종종 동기간들이 들러 간다. 선산벌초 날은 인생 장년기에 이른 남동생들의 웃음소리로 마당 안이 왁자하다. 마을 어른들도 기웃기웃 들여다보며 덩달아 얼굴이 환해지고.... (-215-)
사람에게 남는 기억은 좋은 일이 오래가며 빛을 발할 수 있고, 불미스러운 일이 두고두고 상처가 되어 스스로를 옥죄는 감옥이 될 수 있다.삶의 고갯마루는 자칫 그러한 환경들을 아우르고 있다.후자의 경우 나에겐 요행이도 천운이 따랐지만, 아련한 기억 저편에선 땅거미 질 때의 어두컴컴한 삽화 한 컷이 가슴 저리게 한다. (-263-)
수필가 김선화씨, 1960년에 태어나 1970년대에 10대를 보내게 된다. 이제 환갑을 지나, 생의 남은 시간동안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그 시대를 아우르는 삶의 여유, 우리에게 놓여진 삶에는 인정이 소소하게 있었다. 우회의 미, 직선적이고, 까칠한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도시의 삶이 어쩌면 각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농촌이 안고 있는 고유의 여유로움과 부지런함, 풍요로움이 사라져서 일 때다. 생명의 가치가 어느새 사라지게 되었고,마을에 아기가 태어나면, 서로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함께 나누었던 그 시대의 정이 어느덧 과거의 흐린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행복한 삶을 요원하지만,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삶은 자본이 가지고 있는 검은 그림자이다.
깁선화씨의 수필집은 우리의 시골이 안고 있는 삶을 고찰하고 있었다.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 늙어갈 것이다. 결코 자연의 섭리에 역행할 수 없다.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나보다 앞선 죽음을 반추하는 것이며, 끌어안는 일이다. 그것이 사라짐으로서 내 안의 불안과 초조함이 현존하게 되었고, 현실의 문제만 내 앞에 놓여지게 된다.인정이 사라지고,자본이 현존하는 가운데,세상의 잣대를 돈의 가치로 바라보게 된다.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보았던 과거의 향수들 , 대가족의 고단함과 풍요로움,시끌벅적함, 가을이면 느끼는 추수의 즐거움이 어느 순간 잊혀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