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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론자를 위한 변론
장동익 지음 / 씨아이알(CIR) / 2020년 6월
평점 :
낙태는 임신을 중단시키는 활동이다. 인간의 의도적 활동에 의하지 않은 자연적 원인에 의한 낙태는 태아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선천적 결손이나 분만 장애 등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자연적 원인에 의한 낙태는 통산 유산일아고 부른다. 이 경우엔 낙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인공유산은 약물이나 수술에 의한 인간의 의도적인 활동에 따른 임신의 중단이다. (-27-)
태아는 인간인가? 한편으로 우리는 단언컨데 태아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태아는 결코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생물학적 인간과 도적적 의미의 인간,즉 인격체의 의미를 자지기 때문이다. (-65-)
태아가 인격체와 닮았더라도 태아는 여전히 인격체가 아니다.태아가 완전한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는 것은 태아도 완전한 성숙한 인간의 도적적 지위와 동일한 도적적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는 것은 또한 완전히 성숙한 인간이 가지는 모든 도적적 또는 법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태아에게 완전한 도적적 지위가 부여된다면 생명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낙태는 마땅히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125-)
그러나 태아는 여성의 인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태아의 생존은 여성의 신체를 이용해서 가능하다.태아의 여성 의존성은 세상의 이치이며,자연의 법칙이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당신의 신체를 이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태아가 어머니의 신체를 이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188-)
정자의 권리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없듯이 쌍둥이가 되는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정자가 인격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처럼 수정란이 분할하여 쌍둥이가 되거나 키메라가 될 가능성도 매우낮기 때문이다. (-237-)
세상은 바뀌고 있다.100년전과 지금이 다르고,지금과 100년 후는 달라질 수 있다.세상이 바뀌면 법과 제도를 바꿔 놓고, 여성의 권리, 남성의 권리를 바꿔 놓는다.특히 법은 사회적 강제성을 띄고 있어서,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특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리는 사회의 변화 과정에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합의가 도출되는 겨우가 많았다.여성에게 임신과 출산, 육아가 너무 중요한 이유는 여성에게 아기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계획되지 않은 임신이라 하더라도 내 아기를 낳아서 기르는 것이 당연했던 농경사회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도시의 삶이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여성의 권리를 우선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었다.
낙태를 도덕적인 죄로 생각하였던 이유는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사람이 노동의 가치를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사람이 넘쳐 나고, 여성의 역할이 커지면서,사회에서 여성의 비중이 커져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아이를 낳는 일이 줄어드는 현상은 고무적이며, 낙태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여기서 낙태에 대해서 말하자면,여전히 아기를 낳는 과정에서 여성이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낙태를 허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허용한믄 법률이 통과도리 경우 다시 개정한ㄷ다는 것은 쉽지 않다. 성관계에 있어서 여성 주도적이지 못한 과정이 일어나게 되면서,예기치 않은 임신과 출산이 나타나고 있었다.낙태를 허용하면, 보수주의자와 교화의 반대가 노골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낙태를 반대하면,진보주의자의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생명에 대한 권리를 우선할 것인가, 여성의 권리를 더 우선할 것이냐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생명을 중시하면, 낙태는 허용하면 안된다는 입장이다.반면 여성의 몸, 여성의 권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낙태를 허용하는 입장으로 선회될 수 있다.그 과정에서 사회적인 문제가 일어날 수 있고,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더 가속화 될 개연성이 커저간다. 그리고 장야 아기를 선별해서 낳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낙태에 되한 민감함과 예민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며,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