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물 속에 핀 꽃
장은아 지음 / 문이당 / 2020년 6월
평점 :
봉임은 열네살 먹어서 오 부자네 민며느리로 들어왔다.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성환 일대를 다닐 수 없다는 말이 돌 만큼 오영감네는 땅부자다. (-15-)
박서방 역시 사는 형편이 뻔했지만, 일찌감치 글을 익혔고, 제법 셈을 잘하는 축이어서, 장성하면서 바로 오 부자 댁에 마름으로 들어갔다. (-44-)
오부자 염감이 장가들기 전,열일곱이든가? 열여덟이든가? 사람들이 그를 영천으로 부르던 때에 같은 동네에 사는 쇠락한 양반집 규수를 마음에 품었다. (-60-)
봉임도 방까지 내 준 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주자리까정 깔아주는 건 아니었는디'보임은 하루코 앞에서 석근의 처로서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와락 부끄러운 마음이 치밀었다.미처 생각지 못했던 뒤늦은 수치심에 저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86-)
봉임이 연거푸 아이를 유산한 뒤로 통 태기가 없자 강씨는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했다.석근 역시 봉임에게 몹시 언짢았다. (-114-)
"근우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다는구나.지서당에게 부탁하여 시냐경찰서에 말을 좀 넣어줄 수 있겠느냐? "(-135-)
"혜환'이라고 하자."
오 염감이 아이의 이름에 돌림자인 '환;을 넣어 지어왔다.
"계집아이 이름에 돌림자를 넣어요?"
강 씨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157-)
후쿠다 다카오,노기찬은 석근과는 보통학교 동급생이었다.한 마을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사이지만 두 사람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석근에게 열등감이 심한 기찬이 그럴 만한 곁을 주지 않았다. (-182-)
얼마전에 근우는 조선일은 접어두고 봉천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사회주의에 더욱 심취하면서 그쪽 사람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싶은 듯했다. (-210-)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소설이지만 결코 소설이 아니었다.우리의 과거 100년전의 삶이었으며, 점점 더 몰입하게 되는 이유였다. 역사 속에 한사람의 인생이 바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었고, 이 소설은 공교롭게도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있다.하지만 실제 현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속 주인공 봉림은 부잣집 오영감 댁에 민며느리로 들어가게 된다. 소위 밥풀을 연명하기 위한 구실이었고,그 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봉림과 석근 사이에 태어난 남매들,그중에서 첫째와 둘째는 비명횡사하게 된다.그 이유는 그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사실 그때 당시에는 그러하였다.이유없이 죽어 나갔고, 때로는 예기치 않은 이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봉림은 그렇게 아이를 여윈채, 승환,준환,은환, 민환을 키우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소위 첩에 가까웠으며, 부잣집에 얹쳐 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책은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은 우리의 가난한 자화상이었다. 한 집안에 가족사를 모르다가, 웃어른이 돌아가시고 호적등본을 떼어 보면, 그 안에 감춰진 가족의 우울한 가족사를 엿볼 수 있다. 즉 이 책이 소설이지만 결코 소설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즉 주인공 봉림 할매는 1910년에서 1990년대까지 일제시대에서, 광복,그리고 근현대의 삶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었다. 창씨개명을 해야 하는 일제시대, 글을 몰라도 되는 그 시기에 글을 배울 수 있었던 봉림할매, 오영감 댁에 민며느리가 되었지만, 정실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철처히 가난한 삶을 몸으로 느겼던 시기였기에 가능한 삶이었다. 즉 주어진 삶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아침에 비명횡사하여도 벼다른 조치가 없었을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며느리는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기이다. 바로 이 소설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아닌 새드엔딩으로 끝나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면서도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