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흔들릴 때마다 자란다
박현주 지음 / SISO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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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나의 이십대는 이런 미성숙한 모습의 연속이었다.내면에 옹색한 관점과 마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와 의견이 같아서 친한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적'이었다.그런 이분법적 사고는 나의 내면을 메마르게 했고 나를 옭아매었다. (-40-)


서른이 넘어서 그것도 아역만리 타지에서 예술 공부를 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공부하기 싫어서 수도원에 갔다가 결국 뒤늦게 다시 공부한다고 놀렸다.그 말도 일이가 있다. 그전까지 내가 느낀 공부는 '줄 세우기'에 불과했다.그러나 이탈리아 대학에서의 삶이 나의 이런 생각을 바꿔주었다. (-107-)


예전에는 그 시절 그 순간 나를 인내해주고 도와주었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갚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그런데 때때로 그 시절 인연을 다 일일이 찾아다닐 수 없거나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그럴 때면 시절이 무색하고 세월이 허무하여 슬프기만 했는데 그 고마움을 갚은 방법에 대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만남의 읜연이 어떤 계획이나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 이렇게 받은 고마움을 지금 네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173-)


누군가의 삶은 직선이고,누군가의 삶은 곡선이다. 어떤 이들은 곡선을 넘어서서 지나치게 꼬불꼬불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다.소위 직선으로 가는 사람들을 성공적인 삶, 출세지향적인 삶이라 부르고 있었다.소위 낙하산이라 말하는 것은 최대한 직선에 가까운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자면,우리 대부분의 삶은 곡선이었다.흔들리는 삶, 항상 누군가에게 발목 잡혀 사는 삶의 연속이다. 꼬불 꼬불한 삶은 불행의 연속된 삶이었고,우리는 그것을 비극이라 부르고 있다.
 


각자 삶은 다르지만, 가야 할 방향은 비슷하였다. 나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지나치리만큼 나 의존적인 삶이었고,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저야 한다. 그건 <나무는 흔들릴 때마다 자란다>를 쓴 박현주씨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지극히 미성숙한 이십대를 지나온 저자의 삶은 보편적인 삶의 자아였다. 이지적이고,메마른 삶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그런데 저자의 삶이 나의 삶과 별반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정답과 오답을 오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된다. 수도원에서의 삶, 이탈리아 예술학교에 입학하여, 무언가 시작하는 삶은 상당히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편리한 삶,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다양한 경험을 얻게 되면, 낯선 곳에서 기회를 찾게 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특히 완벽한 삶을 지향하였던 저자는 스스로 그 완벽에서 벗어나 새로운 꿈과 도전, 습관을 추구하게 된다. 용기라는 것은 아주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나에게 익숙한 삶에서 낯선 삶으로 방향전환을 하는 것,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끝까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소소하지만,자기 만족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누군가 의식하지 않는 삶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삶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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