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눈부신지 네가 눈부신지
김지영 지음 / 렛츠북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를 그렇게 단정짓지 말아요.

나는 매일 숫자  보는 일을 하고
규정을 따지고 시간에 쫒기고
효율을 찾고 제테크에도 공을 들입니다

사람들을 웃으며 반기고
그들의 인생 얘기를 즐기고
농담으로 즐겁게 매시간을 보냅니다.

나는 차갑고 꼼꼼하며 속물적이고
가볍고 밝으며 다정하고
교양이 있는데 예의는 가끔 없고
쉬운 듯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죠

하지만 나만의 시간이 오면
촉촉한 음악을 찾아 듣고
이런 글을 쓰며 상념에 잠깁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사랑하고
글과 공부를 좋아하고
내 맘속 그대를 좋아합니다.

나를 그렇게 보이는 데로 단정짓지 말아요.
나는 그렇게 쉽게 이해되지 않을 거예요.

그대 맘을 쉽게 단정짓지 말아요
그럼 그대가 많이 힘들거예요. (-21-)


저장

한참 일을 하느라
저장 버튼을 누르는 걸 깜박했다.
야근까지 하며 열심히 공들인 작업물이 날아갔다.
복구조차 어렵다.
울고 싶다

나와 함께였다가
너와 함께한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다.
내 맘을 흔들던 네 목소리조차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다.
다시 볼 수 없다.
울고 싶다.(-62-)


인셉션

다신은 내 꿈에 나타나지 말아요.
다신는 그 말을 속삭이지 말아요.
다시는 그 표정 보여주지 말아요.

당신은 예고 없이 내 꿈에 나타나
미묘하게 심은 말은 뿌리처럼 자라나
애매하게 지은 표정은 상상 속에 가득 차

계속 돌아가는 팽이처럼 
괴로움으로 반복되는 이 밤과
그 말이 심어져 그 맘이 번져가는 내 맘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내 세계를 위협하는 
당신이 심어준 매혹적인 암시와
그래도 그 팽이를 계속 돌려보는 나. (-99-)


시대정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스한 이불을 덮는다.

이 행복한 시대에 근심은 있어도
이 풍족한 시대에 결핍은 없었다

우린 모래알 같은 작은 걱정만 했고
우리의 모래성은 안전하다 생각했다.

우린 모래알처럼 뭉치지 못하고
우리의 모래성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땅엔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려고
처절히 죽어가던 영혼들이 서려 있다.

이땅은 비옥하진 않으나 그토록 슬프고도 멋있는 이야기가 많다.

영웅적인 영혼들의 이야기가 빚어낸 
단단하고 강철같은 모래알인 우리

잊혀진 영혼들이 살아난ㄷ아
사라진 이야기가 깨어난다

따스한 이불을 걷어차고
이 시대에 몸을 싣는다. (-147-)


아무 문제가 없을 땐 그것이 견고해 보인다. 그 견고함이 무너질 때, 튼튼한 줄 알았던 콘크리트가 콘크리트 외피만 두른 채 모래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불현듯 어떤 일이 자행될 때 마주하는 당황스러움, 어떤 준비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많은 당황스러움과 마주하게 된다.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이 많아진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내 주변에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 그로 인해 나는 밤이 되면,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어있으면서, 눈물짓게 된다. 바로 이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짧은 감상문이라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지극히 시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대체로 많은 시인은 사물을  관찰하고,그 안에서 많은 것을 들추게 된다. 시인 나태주가 그러하였다. 하지만 시인 김지영은 그렇지 않았다.사람이 아닌 사람을 향하였고,타인이 아닌 나 자신 즉 피아와 자아를 선택하게 된다.


숫자에 강하고, 냉정하고, 이성적인 직업 회계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따뜻한 감성이 느껴지는 시였다. 은유와 직유로 채워진 시가 아닌 온전히 일상적인 언어로 쓰여진 산문시였다.어쩌면 이름의 평범함이 평범한 시,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시는 평범하지만, 그 안에 감춰진 시인의 시상의 원천이나 원형은 그렇지 않았다.시인의 내면 속 욕구가 드러나는 그 순간 ,시인의 알몸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보여지게 되었다. 아픈 자아와 아픈 감정과 아픈 심성들, 그런 것들이 층층히 쌓아면서, 피라미드라는 거대한 성을 쌓고 있었다.그 성이 거대한 돌덩아리인 줄 알았는데,시인은 그 돌덩어리가 모래로 이루어진 모래성이었음을 깨닫게 된다.시가 가지는 임팩트,시대정신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시대정신(時代精神) 이 아닌 시인(詩人)의 마음이 투영된 시대정신 (詩代精神)이라 할 수 있었다. 차가움과 따스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시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