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식 이별 - KBS클래식FM <김미숙의 가정음악> 오프닝 시 작품집
김경미 지음 / 문학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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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공중전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텅 빈 공중전화
들어가 동전 넣고 전화 건다

전국의 공중전화들 모두 다 울리리라

달려와 그 전화 제일 먼저 받는 사람
누가 됐든
평생 인연 삼으려는데

벗나무가 받았나

수화기 안에서 벚꽃잎들
우르르 쏟아진다. (_28-)


낭비

신지도 못할 치수의 구두를 산 적이 있다.

입지도 못할 치수의 옷을 산 적이 있다.

기다리지 말아야 할 치수의 시간을 기다린 적이 있다.

커피집이 아니라 인생이

그만 문을 닫을 시간이니

나가달라는 것 같은 치수의 시간을 (-38-)

3초의 결정

때론 3초 안에 결정해야 할 것들이 있다.
5초도 안 되고
1초에서 3초 안에 결정해야 하는 일

순식간에 발견한
횡단보도 건너편의 옛애인

모른 척 횡단보도 가운데쯤에ㅓ 마주칠 지 돌아서서 피할지

5초도 길다
3초 안에 결정하지 않으면

또 인생 엉망진창 된다. (-96-)


물컵의 신비

아들 셋에 딸 하나,네 쌍둥이를 키우는 엄마 아빠는
아이들이 물컵만 쏟지 않아도
살 것 같겠다며
그때만을 기다렸다

어느날부턴가
드디어 네 아이 모두 다
더는 물컵을 쏟지 않았다

더는 물이 밟히지 않는 바닥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엄마는 너무 기뻐서 허둥대다가
그만

물컵을 쏟았다.(-154-)


동시풍으로 - 공원 숲길에서 

맞은 편에서 오소리 엄마가
애기 둘 데리고 오다가
우리를 발견하곤 흠칫 멈춰 섰다

숲으로 잠시 몸을 숨겨주었더니
애기오소리를 몰고 얼른 지나간다

오소리 등뒤에다 가만히 말했다
얘들아 우린 나쁜 사람들 아니야
너희도 사납다고 들었는데 아니구나

등 뒤의 세상도 내게 가만히 말한다
얘들아 나 힘들고 거칠기만 한 곳 아냐
너희들도 삭막하다고 들었는데 아니구나. (-190-)


새로운 기다림

당신의 전화를 기다렸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연못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빗소리도 전화벨 소리로 들으며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지금은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보다 더 잘 웃고, 더 경쾌하고
하고 싶은 일도 더 많고,
모든 일에 결정도 더 빠르고
코도 더 높고 지갑도 더 큰 사람을 기다립니다.

당신 전화 기다리기 전의 
나, 바로 나를 지다리는 중입니다. (-244-)


좋은 시란 여운이 많이 남는 시다.좋은 시는 내 삶에 섬광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시인의 스쳐지나가는 생각의 섬광을 시로 담아 내었듯이 우리 삶에 스처지나가는 생각들은 모여서 좋은 시가 될 재료가 된다. 한 권의 좋은 시와 시집, 그 시집에 나에게 훅 다가와 시의 가치와 의미를 더욱 더 새롭게 해 주고 있었다.


남다른 시집 <카프카식 이별>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흘렸던 것들, 인연과 악연은 분명 언제 어디서나 스쳐지나가듯 내 앞에 나타날 때가 있다.내 감정의 기쁨과 당황스러움이 교차되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옛애인이나 마주치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신호등 빨간 불 앞에서 보았을 때, 나에게 시간과 장소의 선택권은 없었다.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었고,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후환을 없애는 것이었다. 결국 후회의 씨앗을 남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당황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이 우리 삶에 교착되는 바로 그 순간에 나 자신의 탈월한 지혜,분별력이 필요한 순간이다.


사물은 각자 그 쓰임새가 있다. 때로는 그 쓰이새와 상관없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사물을 구매할 대가 있다.때로는 사물의 쓰임새가 다했을 때 사람들에게 외면받는게 상식처럼 느껴졌다.변화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운데, 그 변화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어릴 적 추억과 기억,느낌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그 소박한 마음은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는 단순한 이유로 파괴되고, 소멸되어지고, 흩어지게 된다. 익숙함과 낯설음이 교차되는 데 우리의 인생이었다.


상식.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상식은 언제나 나를 배신하였다. 상식인줄 알았는데,상식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편견과 선입견이 놓여지는 것은 불가피하게 선택되어진 상식 때문이다.거친 것,더러운 것, 골치아픈 것들이 직접 내 눈앞에 보면서,그렇지 않다는 것을 몸과 피부로 느낄 때, 그 순간 다양한 감정들이 샘솟게 된다. 나의 삶과 너의 삶이 모두가 다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우리의 삶이 소중하고, 생명이 소중한 이유,그것들을 시 한 편 한 편을 통해 음미하면서, 느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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