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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 시절 ㅣ 소설Q
금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평점 :
남산촌을 개척한 원로 촌장이자 가장 먼저 외화벌이를 나간 6소대 최갑부 집안 대봉이네 벽돌집이 우리 앞집이었다.대봉이네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고 선 벽돌집이 애화네였고 육계 수백마리를 기르던 조대장은 애화네 앞집, 7소대로 가는 길목의 동네 유일한 구멍가게는 봉금네 것이었다. (-24-)
처가 식구들의 응원 소리 속에 금성은 임신전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신부를 약간 힘들게 업고 나갔다.현관문에 이르러 신랑의 구두 한짝이 없어진 사실이 드러났는데 그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아이는 그전 아이들보다 배로 돈을 얻었다. (-39-)
무군은 삼륜차.나는 자전거에 올라앉아 능금같이 무르익은 석양을 향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남산촌으로 내려갔다.같은 반 친구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그 시절의 그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던 중요한 사건들을 추억했다. (-65-)
기분이 이상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둘 사이에 스킨십이 전혀 없엇던 것은 아니지만 단둘이 한 방에, 한 침대 위에 앉은 느낌은 생경했다.무군이 너무 가까이 앉은 것 같아서 나는 어딘가 위압감을 느꼈다.저리로 가, 떨어져 앉아 하고 내가 무군을 살짝 밀쳤다.무군은 약간 부자연스럽게, 애써 노력하는 듯이 웃어 보였다. (-103-)
늘씬한 몸매와 시원시원한 용모, 한족이라고 착각하게 할 만한 유창한 중국어,그리고 구사장의 억양을 빼닮은 한국어투....겨우 스물예닐곱살의 미스 신은 덕광전자의 직원 중 어느 누구보다 오래 회사에 있어온 사람이었다.아니 , 회사가 설립되지 전부터 구사장을 만났다고 하니 사실은 창업 맴버인 셈이었다. (-145-)
첫차에 올라앚아 출발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느센가 달려온 무군을 보았다.차창 바깥에서 무군은 높은 버스 의자 위에 앉은 나를 올려다 보았다.오래전 어느 점심 때,까만 인민복을 입었던 더부룩한 머리의 소년이 말했다.
-네가 상아란 말이지?
소년의 눈이 상아를 향해 반짝반짝 쟁글쟁글 웃고 있었다.소년은 그녀 너머에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상아를 보고 있었다.(-171-)
1998년의 어느날, 상아는 가난하고 가망없는 고향을 떠나 큰 도시에서 미래를 개척한다는 흥분과 함께,그럼에도 어딘지 마음에 차지 않는 무군과 짝지어졌다는 우울을 동반한 채 기차를 타고 천진으로 향하게 된다. (-201-)
금희의 <천진 시절>은 조선족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개혁개방의 중국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무슬림이 머물러 있는 중국의 시골 남산촌을 배경으로 하여, 상아와 무군은 서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두 사람이 서로 함께 인연이 되었던 건 무군의 누나 때문이었다.농촌에서의 삶,고향이 아닌 도시로 간다는 것은 직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라와야 한다. 1990년대 후반 등소평 체제의 중국은 개혁개방의 물결을 중국사회에 구축해 나갔으며, 그들은 낙후되고,자급자족적인 고향에서 탈피해 도시로 터전을 옮기게 된다.무군과 상아가 동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건 그 시절의 모습과 일치하고 있었다. 도시에 터를 잡고 혼자서 일을 해 나가기에는 상아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많은 리스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군의 누나는 바로 그런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천진의 덕광전자에서, 두 사람은 함께 한 집에서 잠을 청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인연이었다. 그들의 생경한 분위기 속에서 상아와 무군은 약혼을 하게 되고, 노총각 딱지를 뗀 상아의 남동생 금성의 결혼식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고향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문호개방 속에서 그들의 삶이 많이 달라졌음을 금성의 결혼식에서 상아는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삼륜차가 아닌 잦동차를 타고 다닌다는 것,그들의 옷차림과 문화는 그들의 일상 속에 묻어나 있었다.
금성의 결혼식, 정숙과 상아의 만남, 그들은 서로 자신만의 과거 속에 갇혀 있었다. 그 과거의 모습을 작가는 '천진 시절'이라 부르고 있었다. 시골스럽고, 닭과 돼지가 있고,구멍가게가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이 있었던 그 공간, 그 공간이 상해로 옮겨가게 된다. 지극히 낭만적이면서도, 상아와 정숙은 서로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농촌에서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길 순 있어도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팍팍한 삶을 다시 살아간다는 또다른 의미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과 각자의 인생 이야기, 그 안에서 정숙의 삶이 있었고,상아의 인생이 공존하고 있었다. 인민복장의 중국인들의 옷차림이 점차 현대적인 디자인이 가미된 그 모습들, 중국 속에서 느껴지는 공동리 공순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비타협적이며,투쟁적인 공돌이, 공순이가 아니었다. 작가는 바로 그런 중국사회의 모습들, 농촌에서 도시로, 농업에서 경공업으로 바뀌면서,그들의 내밀한 삶,가치관, 문화도 함께 바뀐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