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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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개의 똑같은 기계에서 96명의 일란성 쌍둥이들이 일한다!" 열띤 흥분으로 국장의 목소리가 떨리는 듯했다."너희들은 자신이 어떤 현실에서 살아가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역사상 처음으로 말이다" 그는 세계국의 표어를 인용했다."공동체, 동일성, 인정성." 화려한 미사여구."만일 우리들이 보카노프스키 처리를 무한히 실행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36-)


억제된 충동들은 넘처흐르고, 감정은 범람하고, 범람은 정열이고, 광증이기까지 해서, 그것은 물줄기의 분출력 그리고 장애물의 높이와 힘에 의해서 좌우된다. 가로막지 않으면 물길은 지정된 수로를 따라 거침없이 흘러 내려가 평온한 안정을 찾는다. (태아는 배가 고프고, 날이면 날마다 대용혈액 압출기는 끊임없이 1분에 800회전씩 돌아간다. 흘러나온 유아가 울부짖고, 외분비물 한 병을 든 보모가 당장 나타난다. 욕구와 해소 사이에 감정이 숨어서 기다린다. 그 사이를 단축시키고, 불필요한 모든 낡은 장애물을 무너뜨려아. )(-87-)


구멍이 나면 헌 옷은 버리고 새 것을 사야 해요.'꿰매면 꿰맬수록 가난이 깃든다'고 그러죠.그 말이 옳잖아요? 꿰맨다는 건 사회에 역행하는 짓이에요." 그녀가 주위를 살펴보니 존과 버나드는 그들을 남겨두고 집 밖으로 나가 먼지와 쓰레기 속에서 오락가락 서성거리고 있었다.하지만 린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태아의 독약이 풍기는 악취가 입김에 섞여 그녀의 뺨에 난 털을 스치자 레니나는 뻣뻣하게 몸을 움추렸다. (-193-)


린다에게는 원하는 만큼의 소마가 투약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버나드의 37층에 배정된 그녀의 작은 방에서 계속 침대에 누워,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항상 켜놓고 ,차조기 잎으로 만든 향유가 조금씩만 똑똑 떨어지도록 틀어놓고 ,손이 닿는 자리에 소마 정제들을 두고 지냈다. (-241-)


아일랜드 전역에서 하루에 4시간 작업을 실시했었죠. 결과가 어땠을까요? 불안정과 소마 소비량의 급격한 증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3시간 반이라는 잉여 여가는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사람들은 그렇게 남은 기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따름이었어요. 발명 관리국은 노동력을 절감하려는 조처를 잔뜩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런 계획이 수천 가지나 되죠." (-339-)


디스토피아 소설 중 대중들에게 널리 읽혀지는 책이 조지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있었다. 두 권의 책에서 조지오웰의 <1984>는 현재 중국의 모습이라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현재 한국의 모습과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여기서 이 책을 읽기 전 닉 포스트먼의 <죽도록 즐기기>를 읽었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2015년 읽었던 책을 재독하게 되었다. 2015년, 그 때는 살펴 보지 못했던 그의 생각들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변화과정을 본다면, 미래의 디스토피아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설 <멋진 신세계>에는 소마라는 희안한 물질이 등장하고 있다. 이 물질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고, 인간을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되키고 있었다. 사회적인 불안 , 반복되고,지루함 속에서 경제적인 것만 강조하는 사회 안에서 불안과 공포 ,두려움은 불가피한 요소였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인간이 올라감으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느끼는 위협은 우리 스스로가 추구해왔던 경제성에 있었다. 과거 맬서스의 <인구론>이 먹혀들지 않았던 이유는 팽창하는 인구들을 횡이 아닌 종으로 극복해 왔기 때문이며,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왔었다.


이 소설이 출간된 지 70여년이 흘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아간다. 실제 경제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태아를 낳고 성장하는 것을 축소하려 했던 모습들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에게 적용되고 있다.윤리적인 문제가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예측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며, 자본과 자본가의 논리가 어느정도 극복한 모양새이다. 소비를 지향하면서, 거기서 해어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욕구와 자본가의 이해가 절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생산활동을 통해 초기 사용자에게 높은 비용을 충당하게 하여, 이윤을 빨아들이게 된다.대중적으로 쓰여지기 위해서 그들이 쓰는 기법이 선전과 선동이다. 지금 우리가 텔레비전과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것이 일존의 선전,선동이며, 우리는 그것을 광고라 부르고 있다.즉 우리는 일상적으로 선전,선동 메시지를 습득하고, 학습하면서,그안에서 생각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이 피곤해진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올더스 헉슬리는 조지오웰과 다른 관점에서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조지오웰이 예산한 미래의 모습이 아닌 , 억압하고, 금지하는 것이 불필요한 상태, 즉 억압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놓여진 그 상태가 바로 정보의 홍수이며, 그것은 인간이 사유하지 않고, 책을 읽지 않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예측하였던 것이다. 즉 그의 이론이 점차 먹혀들게 되었으며,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줄어든 상태에서,그 여유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현시점을 볼 때,우리가 노동의 형태는 다르지만, 유휴시간을 방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보고 있자면, 그의 논리가 어느정도 먹혀들고 있는게 현실이라는 것을 한번 더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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