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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 ㅣ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평점 :
녹거나 부서지거나 축소되거나 팽창하지 않은 가장 단단한 진실이 안으로부터 무한히 쪼개질 때에,그것은 파멸일까 생성일까, 어쩌면 지금 여기는 죽음이라는 단단한 껍질 속의 세계.모든 가능과 모든 불가능은 자유일까 속박일까.있지만 있지 않고 ,오지만 오지 않는 것,다가가는 것일까 기다리는 것일까. 욕망하는 것일까 욕망되는 것일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죽음.그래 죽음이다. 내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은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죽음만 지금 여기를 포위하기 때문에.미완성일 때에만 온전해서 끝내 나라고는 호명될 수 없는 것.내가 되면 사라지는 것,그리하여,나조차 나일 수 없게 하는 것. (-17-)
가시밭에 발을 들이면 가시가 발바닥에 박힌다. 견디고 넘어서면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고,더 단단한 발을갖게 되리라고 말한 세계가 등 뒤에 있다.가시 박힌 자리가 곪고,곪은 자리에 다시 가시가 박혀,썩어가는 발을 견디고 견디다 견딜 수 없어서, 나아갈 것인가,돌아갈 것인가.멈춰 서서 왜 아무도 내게 신발을 신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는지 물으면,왜 신발에 대해 묻지 않았는지 되묻는 세계가 등 뒤에 있다.원망하면 ,왜 더 일찍 원망하지 않았는지 힐난하는 세계가 있어서, 아픔이 있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42-)
여기에서 나를 찢어도 좋다.
너무 늙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망상이다. 나는 고작 서른다섯 해를 살았고, 그것은 너무 짧은 인생이다. 만일 내일의 내가 거울 속에서 오늘의 나를 본다면,오늘의 나는 봄에 땅을 뚫고 올라온 풀포기처럼 보일 텐데,삶이 끝나는 날까지 누구도 충분히 늙지 않았다.그러나 나는 내가 아이였을 때에도,내가 너무 빠르게 늙어버니고 있다고 생각했다/.미성숙한 신체 속에서 빠르게 늙어자는 정신은 겅장이 아닌 질병인 줄도 모르고,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가서 이해한다는 것이 착각인 줄도 몰프고,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조금 더 강렬하게 기억했고., 기억 속에서 그 시절을 거듭 살아 긴 시간을 살았다고 생각할 뿐이다. (-97-)
1998년 일어난 한 사건 이후로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2003년부터 진지하게 작가가 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2006년에 겪은 한 사건 이후로 매일 자살을 생각했다. 2015년 봄에 데뷔를 해 재가 쓴 소설로 낯모르는 독자들을 만났다.2016년 가을에 지금까지 발 딛고 살아온 땅이 뒤집어졌다.2017년 연말에는 세계가 한번 무너졌다.2018년 봄에 그 폐허 속에 머물며 주동 피아노를 썼다. 그리고 나는 그 시기에 내가 겪은 사건이나 거기서 느낀 감정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십여년이 넘는 시간을 자살사고에 시달렸다.매일, 매 시간,매 순간 죽고 싶다고 느꼈다.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말이 지나친 과장이라거나 아예 거짓말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내가 오랫동안 세상 어디에도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135-)
저자 천희란 은 소설 <자동 피아노>를 통해 죽음을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하면서, 스스로 죽음을 연기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자살에 대한 충동은 1998년에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이다.그 사건이 연속적으로 어떤 사건들과 연결되었고, 그것이 죽음을 매 순간 기억하려는 목적의식을 습관화하게 된 이유이다. 이 책은 죽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죽음 이전의 삶 ,죽음 이후의 삶,저자는 항상 언제 어디서나,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그건 이 책이 불편하고,읽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공교롭게도 나는 자살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저자의 생각과 사유에 대해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그건 나 스스로 자살 충동에 휩싸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육중한 기차가 철길 위를 빠르게, 내 앞을 지나갈 때면, 앞에 서 있는 안내원을 밀치고 차와 부딪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내가 죽은 이후에 생길 수 있는 수많은 민폐와 원망이 자꾸만 보여졌기 때문이다. 매순간 죽음에 대한 충동을 느끼면서,죽음을 상상하는 저자의 마음이 내 마음과 일치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자는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어떤 상황이 자신의 죽음과 묶인다 하더라도,저자는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그것이 저자가 매순간 소설 작품을 쓰고, 소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쓰는 이유이다. 저자가 스스로 세상 바깥에 있을 때 남겨진 누군가를 위해서였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