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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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얀 포를 훌쩍 걷었다. 두 다리의 발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고,그중 하나는 아예 침대 밖으로 '흘러내려' 있었다.누워 있는 그의 다리를 앞으로 들자, 관절인형처럼 흐물거리고 접혔다.나는 툭, 하고 다리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았다.몸통을 누르자 오도독거리는 소리가 났고,왼팔도 세 조각이었다.피범벅인 얼굴은 왼쪽 두개골부터 안면까지 심하게 무너져 있었다.전체적으로 얼굴 왼쪽이 날아가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두부의 손상 상태를 확실히 판단하기 위해 물컹거리는 머리를 눌러보았고,안면의 상태를 면밀히 확인했다.그리고 나는,곧 훼손된 안면의 주인공을 알아볼 수 있었다.그였다.방금 내 손을 잡아주고 떠나간 그. (-18-)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일에 빠르게 적응한다.의사들도 마찬가지다.죽음을 마주하는 충격을 직업적인 사명감으로 몇 번 견뎌내고 나면, 어느 순간 왠만한 죽음에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대부분이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처음 해부용 시체를 마주했던 순간이나, 처음으로 사람에게서 생명이 빠져나가 사체로 변하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은 똑똑히 기억할 수 있지만,어느덧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무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나도 점점 무뎌져 갔다.시신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든 전혀 두렵지 않았다.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주변 의로진도 마찬가지였다. (-66-)


그는 분명히 머릿속에서 그 한시간 반을 재연하고 복기하며,텔레비전을 보던 자신의 두 눈을 뽑고, 농담을 지껄이던 혓바닧을 잘라내던지는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의식을 잃고 축 늘어져 고요히 죽어갔을 아버지,내가 편히 누워 있는 동안 옆방에서 아직 죽지 않아 매달려 계셨을 당신, 끝까지 혼자였던 당신.그는 그 한시간 반을 할 수 있는 만큼 세밀히 기억해 저주하며 평생 잊지 모하리라.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이 저지른 마지막 불효,불효보다는 자신에게 벌어진 참극, 참극보다는 지옥의 시간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마저 사라지자 나는 바닥부터 아묵덧도 남지 않은 채, 오직 저주의 암흑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숱한 죽음을 단정 짓는 내 혓바닥을 잘라 내던지고 싶었다. (-133-)


비오는 날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역시 잘 구운 파전에 막걸리나 동동주 한잔인가요.아니면 따뜻하고 얼큰한 국물에 소주 한잔이나 방금 튀겨나온 치킨에 청량한 맥주 한잔인가요.그것도 아니라면 기름기 줄줄 흐르는 곱창도 괜찮겠어요.치즈를 듬뿍 올린 피자나 윤기 흐르는 짜장면은 어떻고요.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욕망은 비슷합니다.물어보면 그런 것들을 먹었답니다.파전을 먹고 체한 사람,치킨을 먹다 넘어진 사람,매운탕을 먹다가 서로 드잡이 한사람,곱창을 먹다가 두드러기가 난 사람,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술 냄새가 어찌나 독하고 구수하게 나는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먹었던 음식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비오는 날 사람에게서 나는 체취와 함께요. (-196-)


감정이 폭발한 어머니와,폭발적으로 쪽팔린 아들의 말다툼은 상황을 알고 있는 우리가 듣기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대화가 계속되자 우리는 과장님 등 뒤에서 숨어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다물고 키득대기 시작했다.아마 한 명만 못 참고 웃어버렸으면 다들 쓰러졌으리라. 하지만 엄숙한 회진 시간에 우리는 의료인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고 있었다.나는 주치의였기 때문에 남들처럼 과장님 뒤에 숨을 수 없어 과장님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얼굴 근육이 마비되고 정신이 거의 몽롱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과장님은 아랑곳없이 아무 눈치 없는 복통환자의 진료를 보면서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그를 바라보았다.마침 응급실 창밖으로 햇살이 내리고,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과장님의 얼굴에 볕이 비쳤다.그 순간 나는 보았다. 근엄한 과장님의 번쩍이는 금테 안경 뒤로 씰룩거리는 눈주름과 맺힌 눈물을,이를 악물어 어긋나는 양측 턱을,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패인 볼살을 , 아, 언제나 진중했던 과장님도 지금 필사의 노력을 하고 계셨다. 그렇게 ,그 말할 수 없는 곳에 관한 이야기와 아침부터 벌어진 모자의 언쟁은 우리 전부를 니르바나 Nirvana 로 인도했다. (-242-)


발표를 다 마치자 과장님은 가정폭력 신고를 했느냐고 물었다.나는 워낙 빈번한 폭력이고, 아이가 거의 다 큰데다가,어머니도 같이 있어 언제든 신고가 가능할 것이라고 얼버무렸지만,결국 신고를 누락한 죄로 문책당했다.그리고 과장님은 마지막에 온 좀비들의 눈에 들어간 화학약품의 정확한 성분을 물었다.나는 그런 것까지 파악할 겨를이 없었기에 결국 다시 꾸중을 들었다.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조건적으로 지탄받아야 했다.이것이 지난 날 당직의 성적표였다.
나는 잠이 들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응급실 문밖을 나섰다.전날 내려 쌓인 눈이 사람들의 발길에 뒤섞여 검게 곤죽이 되어 있었다.그래서 온 거리가 진창이었다.'아 ,어제 눈이 내렸구나,성탄절의 하얀 눈....사람들은 눈을 맞으며 행복했겠구나.'나는 기절할 것 같은 정신에도, 내가 도저히 가질 수도, 알 수도 없었던 행복에 관해 생각하며 진창이 된 거리를 걸어나갔다. (-313-)


2019년 12월 4일, 영주 선비도서관에서 남궁인 특강을 저녘 7시부터 2시간동안 쉬는 타임 없이 끝까지 들었다.그때 당시 특강의 주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서였으며, 그의 대표 저서 두권을 들고 강연이 끝난 뒤 줄을 서서 사인을 요청하여 받아온 적이 있었다.그때 당시 느꼈던 그의 강연은 진솔하였고, 솔직하였다.응급의학과 전문의 남궁연은 사선에서 전쟁을 치루는 의사였고,하루에도 몇번씩 죽음과 사투하게 된다.그의 특강 중에는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었었다. 자신의 집에 어두운 암실이 있어서,스스로를 가두어 놓는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라 하였다.아무리 남의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 하더라도,매일 그것을 본다는 것은 맨 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일게다,그럼에도 저자는 버티었고, 또 버티면서 살아가게 된다.


사실 그렇다.우리가 생각하는 응급실은 자본의 논리에 길들여져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응급의학과 전문의 남궁인님에게는 메스를 들고 전쟁터에 나가는 곳이며, 항상 매일 매일 죽음과 사투하게 된다.책에서 자살, 낙상,심폐소생술,피범벅,수혈이 등장하는 것을 본다면,우리가 영화 킹덤에서 보았던 그 음울한 장면들의 실사가 그앞에 매일 매일 놓여지게 된 것이다.인간의 몸과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세균과 사투를 벌이는 공간 속에서 인간이 느껴야 하는 자괴감과 좌절, 포기하고 싶은 약해 빠진 내면의 모습들을 엿볼 수 있었다.살아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이지 않기 위해서, 유혹에 시달리지 않기 위한 저자의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져서 연민의 정을 생각하게 된다. 한 권의 책에는 우리의 인생의 희노애락이 모두 모여 있었다.대한민국 전역의 변사체 소식은 응급의학과 전문의 남궁인
님 앞에 모두 듣게 된다.어떤 장소에서든지,어느 장소에서든지 의사로서 본분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휴대폰 울림 속에 있었다.소방서에서 소방관은 환자의 사망 선고를 할 수 없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 응급조치를 하게 된다.인간의 보편적인 몸의 각각의 부위들이 제각각 제자리에 있지 않고, 제각각 놀고 있을 때 ,그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죽이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하게 굳어버린 차가운 시체 덩어리였다.그러한 그의 모습,그의 인간적인 연민, 맨 정신으로는 결코 겪어보지 못하고,느껴보지 못했을 저자의 자괴감과 절망감은 우리가 쓰는 언어로는 표현하기가 힘들 것이다.다만 우리는 그 순간에 시간과 장소가 서로 날줄과 씨줄처럼 엮여 있는 상황들을 상상할 뿐이었다.그리고 우리는 삶과 죽음 앞에서 나약한 한 인간을 바라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고, 나 스스로 겸손할 수 밖에 없음을 상기시켜주게 된다. 그리고 그 어떤 상황이 내 앞에 다가온다 하더라도 무너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나 스스로에게 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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