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처럼 - 도청의 마지막 날, 그 새벽의 이야기
정도상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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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곳에서 총소리가 울렸다.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 것이다.내일은 희순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날이 밝으면 손에 쥐고 있는 카빈 소총을 놓고 여기를 떠날 것이다.집에 돌아가자마자 라면을 끓여 국물에다 소주 한잔을 마시고 푹 잘 예정이다. (-9-)


그는 애 앞의 빈 잔에다 소주를 채웠다.이어 빈잔을 내밀었다.내가 그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영준 형이 '건배'하며'단숨에 소주를 들이켰다.나도 마셨다.영준형이 소주잔을 머리에 거꾸로 올려놓고 '딸랑딸랑'이라고 했다.모두가 웃었다.

영준형은 진짜 고아였지만 나도 고아처럼 자랐다.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시골에서 올라와 이곳저곳 가게나 공장을 옮겨 다니며 지금껏 살아왔다. (-44-)


그러다 희순을 보았다.광천동의 수많은 여공 중에서 특별히 더 눈에 띄지도 않은 사람이었건만,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운명적으로 끌렸다.망치질에 튀어 오르는 쇠부스러기에 햇살이 비친 것처럼 그녀한테 광채가 피어올랐다.내가 본 것은 그 광채였다.친구들은 내 말을 듣고 눈이 삐었다는 둥 명태 껍질이 씌었다는 둥 농담을 던비며 놀려먹었다. (-111-)


"우리는 선생이 아닙니다.강학이라고 부릅니다.가르칠 강 배울 학.우리는 여러분한테 조그마한 지식을 가르치지만 여러분은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여러분은 우리를 강학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여러분을 학강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이 말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지."상우형이 말했다. 
그날 ,희순의 본명을 알았다.김희순이 아닌 박희순,대학을 다니다가 자퇴하고 야학을 열고 스스로 공순이가 된 여자의 이름,처음엔 여공이 아니라 실망했고,다음엔 대학생이었다는 사실에 절망했었다. (-151-)


나는 들풀에 와서 슬픔을 알았다.
'앎'은 기쁜 것만이 아니다. 어떠한 모순 속의 불순물을 알면서 그 불순물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나 자신의 무력감을 알았을 때 심히 괴로운 것이다.옳다는 것을 알면서 과감히 행동하지 못한,용기 없는 나를 얼마나 비관했는가!
하지만 인생은 비관하는 것만이 ,포기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어둠 속의 한 가닥 희망의 빛줄기를 잡고 맹목적일망정 전진하는 것이다.그런 과정에서 나는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들불은 지식인과의 인간적인 만남이다. 배움의 욕망을 간직한 채 들불에 왔다.현 사회의 학력의 불공평함을 느끼고 나도 배워서 남들이 말하는 검정고시를 보려고 왔다.하지만 지금은 배움의 욕망보다 배움의 필요성을 알았다.(-198-)


5.18민주화 운동 40주년이다.작년 39주념 때 광주 망월동에서 보았던 그 기억들과 무덤들, 사람들은 그곳에서 묵념하였고,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그리고 나는 그 역사적인 잔상들이 현존하고 있었다. 1980년 나는 그때 당시의 기억이 전무하다.핏덩이 아기였던 그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망월동, 광주광역시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대치하였던 스물 남짓 청년들의 함성,울부짖는 절망감은 그들만이 알 것이다.다만 그들의 목소리와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해 왔던 노력들을,21세기 누군가는 물거품으로 만들려 한다는 것에 대해서 절망감과 자괴감이 몰려왔다.광주시 금남로 구묘역과 신묘역 그 교차점에서 느꼈던 슬픔,그것은 직접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알길이 없었다.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이고,시신이 여기저기 방치되었다는 그 사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느낄 뿐이다.물론 그때의 당시의 모습을 기록한 소설 정도상 씨의 <꽃잎처럼>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이 소설을 쓰면서,여러가지 역사적 사료들을 모았을 것이다.그 과정에서 주인공 노명수를 중심으로 그때 당시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었다.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이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었던 그 순간에 몸통이 대검에 짤리고, 시신이 부패하는 과정에서 쓰러지듯 , 그들은 자신의 외로운 투쟁을 하게 되었다. 실제 역사와 맥을 같이 하였던 정치인 김근태는 이 세상에 없었다.지금 현존하는 이해찬 의원도 마찬가지로 그때의 고문의 흔적과 잔혹함을 가지고 살아왔다. 쓰러질지언정 스스로 무너지지 않겠다는 그들의 정신이 우리에게 아픔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소설 속에서 그들을 소리지으면서,울부짖고 있었다.배우지 못해서 그들은 군홧발에 짖밟혀야 했고,대검과 계엄령 앞에서 무너져야 했다.주인공 명수와 박희순의 러브 스토리는 자처하고, 이 소설의 핵심은 바로 그들이 애쓴 흔적은 성공의 달콤함이 아닌 씁쓸한 실패로 귀결될 거라는 것이었다. 금남로 대로 앞에서 군인들과 부딪치면서,장갑차 앞에 서서 누군가의 죽음을 몸으로 표현하려 했던 그들의 울부짖는 그 심정들이 외신을 통해 타진되고 있었었다.소설은 바로 그 총탄이 남아있는 대학교 건물을 조망하고 있었다.군인의 군홧발에 죽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해야 할 것인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였다.내 앞에 내 가까운 누군가가 죽는다면,목잘린 시신이 방치되어 있음을 보았다면, 그 순간 우리는 눈이 돌아갈 것이다.누군가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이어지더라도 그들은 반드시 저황할 수 밖에 없었다.고아라서 저항하였고,공돌이라서 저항하였고, 공순이라서 그들은 사회적인 차별과 불평등에 저항하게 된다,.그러면서 그들은 배우지 못한 것이 자신들의 운명적인 이유라고 생각하게 된다.강학을 열고 검정고시에 합격하려 했던 그들의 아픔들이 여전히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다만 작가는 그 시대의 경험들을 몸으로 느껴보지 못하였기에 한편의 소설을 완성하면서,5.18의 아픔을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한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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