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황상훈 지음 / 바른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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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산다.

스물셋의 황상훈

그대 이마 보고
달보고

그대 눈 보고
별보고

그대 입술보고
그대 입술 보고
그대 입술 보고

그대 한 번
하늘 한 번

그렇게 나는 산다. (-18-)


아버지의 시집

스물다섯의 황상훈

낡은 책 텁텁한 냄새가 방안에 나풀거린다.

바래진 표지를 한 꺼풀씩 넘길 때마다
눕눕한 냄새가 코끝을 아린다.

40년 동안 하양 마음 태워 버려
누렇게 볼 발그레진 네가

세월의 향내 조심스레 내비쳐
오래도록 함께한 옛 친구인 네가

백발 되어 방긋이 웃는
나의 순한 아버지처럼

거룩하디 수더분한
고서가 되었구나

너를 내 아들에게 물려주련다.

코팅지에 빳빳이 반들거리는 사전보다
바래고 냄새나는 너를 물려주련다.

아버지의 마음으로.(-43-)


왜 시냇물 소리에 그대 생각이 날까

스물의 황상훈

내 마음이 졸졸졸
그대에게 닿기를

호리병 매듭지어 온전히 보냅니다.

내 사랑의 시 한 편을
마개 지어 넣었으니

오 그대여 부디
풀어 읽어 주시렵니까

그대 마음이 졸졸졸
내게 닿기를

그지 없는 기다림도 고스란히 받을 테요. (-85-)


생리

스물넷의 황상훈

어머니의 생리는 숭고하다.

숭고하다 못해
나를 잉태했다

여동생의 생리는 안타깝다.

안타깝다 못해
내가 아파주고 싶다.

남자들은 결코 알 수 없다

그리하여

거룩하다. (-115-)


제목도 독특하고, 형식도 독특한 시 한 편을 접하게 되었다.풋풋하면서도 성숙되어진 한 편의 시,시인 황상훈의 처녀 작품시 <사이비>였다.살아가면서,느끼는 수많은 순간들이 시 한 편을 읽으면서,주마등처럼 지나가게 된다.내 앞에 놓여진 미움조차도 그 미움이 미워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내 가족에 대한 미안함, 어떤 물건이 가져주는 가치는 그 사람의 삶과 엮여 있을 때 ,그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숭고함이 있었다.남자와 여자,그 극복할 수 없는 선, 그것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인생의 차이와 맥을 같이하게 되는 것이다.폭력적인 삶,공격적인 인생 희노애락 중에서 존중과 사랑과 감사함을 얻는 순간이다.


하나의 물건, 새것이었던 그 물건이 시간이 흘러서 낡은 것으로 바뀌게 된다.현재와 과거가 되는 그 순간을 기억하게 되고, 새것이 낡은 것으로 바뀌게 된다는 진리와 마주하게 된다.그것은 시인에게 특별한 순간이었다.자신이 현재 마주하고 있는 새것들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낡은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낡았다고 버리고,배척하고, 차별하는 일회용 물건들이 중심인 세상 속에서 인간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소중한 물건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군상을 엿보게 되었다.시인은 대구와 은유를 통해 우리의 인생을 고찰하고 잇었다.때로는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인 욕구에 도취하게 되고,때로는 새로운 것에 집착하게 된다.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그리고 잊지 않아야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 지워지지 않는 것들,기억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어느 순간 문득 기억나게 되는 그 순간 우리는 그 순간에 대한 애틋함을 잊지 못하게 되고, 후회를 반복할 때가 있다.시인 황상훈님의 시가 가지는 힘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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