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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평점 :
아무튼 그때의 나는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있었다.12시 정각이었고 막 서울에 도착한 참이었다. 여벌의 옷이 든 가방,9만 8천원이 든 지갑,마흔 다섯의 나이와 텅 빈 시간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거리는 여름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간혹 한 줌의 행인들이 힘없이 지나곤 했다. 길면 일주일,짧으면 이틀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를 돈을 들고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네개비째를 피운 후 핸드폰을 꺼냈다. 그제야 구직사이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사람을 상대하거나 어울릴 필요가 없는 일이라면 종류는 상관없었다. 남는 것은 육체노동 뿐이었다. (-12-)
"자본주의라고요? 고객님 자본주의 논리를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자본주의 논리로 해보죠.이 택배 배송비가 천백원이에요.아침에 분류작업하는 노동비.배송 노동비.차량유지비, 유류대,보험료, 전화비,클레임과 분실비용,제 이윤 등을 빼고 나면 여유분은 없거나 많으면 일원이나 이 원이 남을지 몰라요.택배 하나당 말이죠.그럼 설명 좀 해주세요.도대체 일원이나 이원의 서비스가 어떤 것인지.케인즈의 관점의 거시경제학으로? 아님 하이테크의 영향을 받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로? 설마 마르크스의 잉여노동으로 설명하실 겁니까? 혹은 애덤 스미스의 푸줏간 주인의 이기심? 어떤 논리로 저를 설득시키실 거가요?" (-80-)
"어이,택배."
금테 안경을 낀 깡마른 남자는 노예를 부릴 때 쓰는 말투로 내게 말을 걸었다. (-88-)
"101호요."
"저는 401호 삽니다."
뭐라고 ?서른 가마를 4층에 ? 발악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소앙에는 101호라고 나와 있는데요?"
젠장 ,'그러니 101호 앞에다 놓고 갈게요'라는 뜻이었다.
'여긴 아들 집이고 난401호 살아요.보내는 사람이 호수를 고치라고 해도 매년 이렇게 보낸다오." (-155-)
슬슬 진도가 너무 나가고 있었다.
"진리와 진실은 달라요.진리는 사는데 도움이 되죠.하지만 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모를 때는 알고 싶지만 알고 나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상처만 배부르게 먹는 거죠.일어난 일은 일어난 대로 흘려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살면서 모든 일의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205-)
젠장 ,또다시 술판은 개판이 될 판이었다.바나나 형님의 말이 떠올랐다.
'주창이와는 술 마시면 안 돼.'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주창이는 인연의 질긴 끈을 만들고 있었다.고맙다고 해야 할지,이제 그만 좀 하라고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324-)
자본주의 사회의 뿌리에는 자본과 편리함이 감춰져 있었다.자본이 사통팔달 퍼지려면 편리함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인간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돈을 쓰지만, 편리한 삶을 살기 위해서도 우리는 돈을 쓰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재화가 쌓이고, 교통을 통해 물류가 오가게 된다.그 물류의 중심에 택배가 있다.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시켜 주는 인터넷과 택배는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적셔주기 바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우리 사회의 뿌리 역할,택배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강남 터미널을 거점으로 살아가는 일회성 택배 노동자이며, 택배 노동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우리가 생각하는 택배 직원의 모습, 고객의 갑질에 수긍하는 택배 직원이 아닌 할말은 똑 부러지게,논리정연하게 말하는 택배직원이다. 즉 갑과 을이 바뀐 형태,고객의 부당함에 할말은 꼭 하는 택배직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가오나 눈이 오나 택배는 돌아간다. 사람들이 구매한 물건들은 소비하고, 장소를 이동하기 때문이다.온라인이나 전화로 주문한 물건을 택배로 이동시키고, 택배 직원은 그 과정에서 수수료를 챙기게 된다. 매일 몇십건의 택배 물류를 확보할 때,타산성이 맞고, 돈을 벌 수 있는 수익구조를 가지고 있다.고객이 갑질하고, 부당한 처우에도 말할 수 없는 이유, 주 5일제가 불가능한 사회적 구조가 택배직원에게 있다.특히 성수기나 명절이면,택배 직원은 거의 죽음에 가까운 물류를 소화하고 있으며, 그들의 일상은 궁금한 가운데 흥미로웠다
소설 속 주인공은 해운동 택배라 부르고 있었다.같이 일하는 택배 직원 동료 주창이가 건네는 술 한잔으로 인해 생기는 물류 차질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된다. 내가 빠지면 그 물류를 남은 사람이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불가피하게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또다른 인물,민폐 택배직원은 교묘한 행동으로 ,소설 속 주인공을 유혹하고 있었다.그 과정에서 다양한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있으며,온전한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생리문제를 차안에서 해결햐야 하는 직업적인 특징도 파악할 수 있다. 철저히 혼자서 일하는 직업으로 매일 바쁘게 움직이는 그들의 삶을 보면, 살찔 겨를이 없었다. 고객이 원하는데로 맞춰져야 하는 현실, 엘리베이트가 없는 어정쩡한 아파트는 택배직원에게 고난 아닌 고난을 안겨주고 있다.한편 소설 속에서 또다른 인물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사람을 전설이라 부르고 있다.예고되지 않은 어떤 사건, 그 사건으로 인해 예고되지 않은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고, 주인공은 점점 곤경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