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 - 개정증보판
배한철 지음 / 생각정거장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동안 조선 어진 중 얼굴 식별이 가능한 온전한 어진은 태조,영조, 연잉군( 영조 왕자 시절),철종 어진 등 전부 합쳐 4점 (사진이 남아있는 고종, 순종 제외) 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점이 추가로 확인돼 관심이 비상하다. 바로 선조 아들이자 인조 생부인 <원종 어진>이 바로 그것이다. <원종 어진>은 길이 190츠 (족자)에 이르는 대형 초상화로 오른쪽 일부가 불에 탓지만, 얼굴과 복장 대부분은 잘 남아있다. (-96-)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자를 전면 부정하고 경전 해석에서 독자적 경지를 개척해 '사문난적(유교를 어지럽히는 도적)'에 몰린 조선 성리학의 거목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윤휴(1617~1680)이다.그는 천하의 이치를 주자 한 사람이 모두 알수 없으니 ,학자는 무릇 주자으 학설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윤휴는 주자학을 흠집냈다는 죄목으로 죽임까지 당한다. 윤휴는 조선 후기는 물론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단시 돼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거나 기피했다. (-202-)


다산이 유배를 살았던 지역인 전남 강진군은 다산 현창사업을 추진하면서 2009년 각종 문헌과 다산의 직계후손 네 명의 인상을 참고해 새로운 영정을 제작해 발표했다.영정은 방대한 독서량과 저술로 인해 시력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기록에 근거해 돋보기안경을 낀 모습이며 눈썹이 세 갈래로 갈라진 흔적도 표시됐다. (-275-)

독사를 하면서 여가를 즐기다는 뜻의 <독서여가>에는 툇마루에 나와 앉아 망중한에 젖어 있는 선비가 등장한다.선비는 정선 자신이다.단정하게 차려 입은 겸재는 한 손에 부채를 들고 편안한 자세로 화분을 바라보고 있다.초가집과 책장의 책들,화분에 핀 난초와 작약,방 뒤쪽에 서 있는 푸른 향나무 등은 겸재가 추구했던 소박하면서도 고상한 정신세계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75-)


100원, 1000원,5000원, 1만원, 5만원에는 한국 조선시대의 몇 몇 이들의 영정 사진을 도안으로 해왔다.이순신, 이황, 이이, 신사임당,이들의 도안을 보면 실제 인물의 모습을 그려 낸듯 보이지만 1900년대 새로 제작된 상상화다. 특히 성웅 이순신의 영정은 조선 후기에도 여러점 남아있었음에도,이후 대부분 소실되거나 민간인이 보관하고 있어서,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파악할 길이 없다는 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책을 보면 조선시대 27대 임금 중 다섯을 제외한 나머지 어진은 두번의 전쟁으로 인해 화재나 여러가지 이유로 불타거나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게 된다.특히 태조 임금의 어진은 여러번 초상화로 제작되었지만, 그중 하나만 현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즐겨보던 프로그램 tv 쇼 진품명품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안보지만,오랫동안 사랑했던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그 중에 비싼 가격에 책정된 문화재가 있었는데, 사람의 얼굴만 그린 초상화였다. 여기서 그 초상화와 같거나 비슷한 초상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윤두서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였으며, 여느 초상화와 다리 무섬증을 느낄 정도로 매서운 눈빛을 읽을 수 있다. 실제 초상화는 실사에 가깝게 그려내고, 그 시대에는 초상화를 어떤 기법으로 그려냈는지 파악하느 과정이 묘사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내가 보았던 것들, 영정 속에서는 그 시대의 복색이나, 삶, 그 사람의 병세나 삶의 척도를 읽을 수 있고, 오래된 영정의 경우 모사하는 과정에서 복색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 흐름을 찾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결국 초상화는 우리가 새각하는 사진 기술이 없었을 때 사진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어진을 여러차례 그리고, 그 어진을 모사하는 일련의 과정들 속에 우리의 역사적인 슬픔과 아픔이 숨어 있었고,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안향의 영정과 단종의 일화는 내가 사는 지역과 엮여 있는 대목이어서 눈에 보였다. 또한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는 사이코패스였다. 사도세자가 직접 죽인 사람이 숫자로 100여명에 이른다하니 ,그도안 역사는 왜 사도세자의 잔인함을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영정 사진도 여전히 우리는 알송달송하며, 현존하는 영정도 명성황후 영정인지 아닌지 논란이 많은 부분들이 있었다. 결국 우리의 수많은 초상화들은 그 시대으 역사를 담아내고 있으며, 여러 이유로 인해 소실되고 있었다.사진으로 대신할 수 없는 초상화만의 특유의 깊은 심연,그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