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뒤편 - 근대 여성시인 필사시집
김명순 외 지음, 강은교(스놉) 캘리그래피 / 제우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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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나혜석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인 인형으로
그네들의 노리개였네

노라를 놓아라,순순히 놓아다오
높은 장벽을 열고
깊은 규문을 열고
자연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지 전에 
자녀의 어미 되지 전에
첫째로 사람이 되려네

나는 사람이로세
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천부의 힘은 넘치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 오라
일어날 힘을 발하여라
새날의 광명이 비쳤네. (-26-)


내 가슴에 -김명순

검고 붉은 작은 그림자들.
번개 치고 양 떼 몰던 내 마음에 눈 와서
조각조각 찢어진 붉은 꽃잎들같이도
회오리 바람에 올랐다 떨어지듯
내 어두운 무대 위에 한숨짓다

나는 무수한 검붉은 아이들에게 묻노라
오오 허공을 잡으려던 설움들아
분노에 매 맞아 부서진 거울 조각들아
피 맞아 피에 젖은 아이들아
너희들은 아직 피를 구하는가. 

아 아 너희들은 내 맘의 아픈 아이들
그렇듯이 내 마음은 피 맞아 깨졌노라
내 아이들아 너희는 얼음에서 살 몸
부질없이 눈 내려 녹지 말고
북으로 북행하여 파란 하늘같이 수정같이
얼어서 붙어서 맺히고 또 맺혀라! (-44-)


단상 -강경애

눈은 옵니다.
함박 눈은 소리없이
나려옵니다

님께서 마즈막으로 떠나시며
나에게 하시던 말씀
오늘이 며칠인가요
동지달에도 스무 나흐레...

반밤에 나는 남몰래 일어나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왼 뜰을 헤매이었습니다
님께서 이리도 차고 매우지매
이 눈길을 떠나신가 합니다.

그러고 두 번 다시는
돌아오시지 못할 길이오매
이 밤이 새도록
눈이 나리는가 합니다

눈은 옵니다
함박눈은  소리없이
나려 옵니다.(-50-)


새벽의 소리 -김일엽

쌀쌀히 쏟아지는 찬 눈속에서
그래도 꽃이라고 피었습니다.

높고도 깊은 산의 골짜기에서
드문히 떨어지는 조그만 샘물

그래도 깊이 없는 대양의 물이
그 샘의 뒤끝인 줄 알으십니까.

공연히 어둠 속에 우는 닭소리
그래도 아십시오.새벽이 오는줄. (-90-)


코스모스 -백국희

빛난다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뽑은 듯 나릿한 몸매
살랑거리는 모양이 눈에 보인다
가벼운 속삭임이 흘러
눈썹을 간즈린다.

밖엔
고달픈 애수가 헤매고 있다
벗은 나무들 피곤한 팔 드리우고
가을바람은 마른 잎을 뿌린다

웃음과 눈물
좀더 가까이 서자

빛난다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밝게! 차게! (-198-)


여류시인 김명순,나혜석, 김일엽, 강경애,백국희의 시, 그 시에는 그 시대의 삶이 노출되고 있었다.근대라는 인간이 정해놓은 시간의 경계 안에서 살아야 했던 여성의 삶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아이를 낳는 기계로 치부되던 그 시절, 차별과 편견, 선입견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배움의 가치,교육의 가치는 한정적이었다.고통스러운 삶, 곤나 속에 몸부림치던 날, 스스로 한이 서려 있었고,그 한을 풀 길이 없었다.배움을 통해서 습득하게 된 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고,,그것이 온전히 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다.


누군가는 현실과 타협하고,누군가는 현실에 저항한다.비폭력,그 안에서 시인 김명순, 나혜석,김일엽,강경애,백국희의 시에는 지극한 암울한 현실과 교차되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 현실에서 벗어나 스님이 되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그리고 시인 백국희는 20여년 남짓 짧은 인생을 살다가게 되었다.비록 후회하는 삶을 살더라도 나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여성은 세상이 자신을 깨우치도록 허용하지 않으며, 스스로가 세상에게 자신의 깨우침을 알려주고 있었다.큰 변화의 흐름이 탄생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언어였다.깊은 사유의 시선들,그것이 농축되어 하나의 시 안에서 문장과 문장이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엮이어 있었다.돌이켜 보면 언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거였다.누가 어떻게 조합하는냐에 따라서 언어에 생동감이 고스란히 느껴질 때가 있다.내 삶과 내 경험과 내 감정이 서로 엮이고, 교차될 때 ,그들이 남겨놓은 시어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이 되고, 위안과 위로의 메시지가 되는 거였다.한 편의 책 속에 담겨진 다섯 시인의 시들 속에 우리의 애환이 깊숙히 응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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