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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ㅣ 걷는사람 시인선 20
이소연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2월
평점 :
철 4
나무를 분질러 들고 공터를 누리던 아이들은
철모를 꼭 한 번 싸보고 싶어 했다.
영웅이 철모 안에 머리를 둔다고 배웠다고
우리가 흉내 낸 말들 중에는
교각을 폭파하라는 수신음이 있었다.
하나의 건물에서 여럿의 사람들
아직도 걸어나온다.
온전한 것은 환상이다.
포가 서 있는 바다
거기 파도를 닮은 사람이 있었지
지금은 저녁이 내리는 거기
방치한 것들에게로 돌아가라
나를 먼 곳으로 오게 하는 마지막 눈꺼풀처럼
너무 캄캄한 길모퉁이
우리의 죄가 파헤치고 있다.(-19-)
나무는 솔직하죠
그 앞에 앉아 있느라 나는
조금 더 비좁아지고
거둥이 불편해집니다
나무가 아름다운 건
솔직히 언제나 혼자이지만 혼자인 적 없기 때문인데요.
저녁을 먹자는 나무에게
금방 이른 저녁을 먹었다고 얘기하는 나무와
다시 저녁이 되는 나무 중에 누가 더 아름다울까요? (-37-)
물위를 걷는 도마뱀; 빗방울
빗방울이 물 위로 떨어지는 순간의 무늬를 기억한다.
나는 , 보름째 빈 집.
물고기와 새를 찢고 내장을 훔치고 싶다.
꼴깍, 침 한 모금 삼키고
가장 낮고 부끄러운 발바닥을 펼쳐봐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수면이 탱탱하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1초에 스무 걸음씩 미련이 사라지네
그렇게 너를 건너왔다 나는
내가 그렇게 우스워 우스꽝스러워 웃겨
휘젓는 발목을 가진 소나기를 좋아하니?
허약한 날개를 입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
물 위를 달린다
하필 너는 내 등이 비워진 것을 봤구나?
나는 결국 빗방울,그 허방의 힘으로 미끄러지는 소리
밟고 온 물길을 뒤돌아보지만, 저편의 기억은 하나도 없다. (-69-)
하나의 시를 읽으면서, 개념을 스처가게 된다. 시상을 읊조리면서,시어들 사이 사이에 허상을 채우게 된다. 시라는 것은 지극히 시인의 시상이 담겨져 있으며, 관념적이다. 시를 읽으면서, 각자 나름대로 자기만의 해석에 따라가게 된다.어떤 시는 서정적이며, 시를 통해 시의 깊은 의미를 받아들이게 되고, 어떤 시는 색채에 입각하여, 색 안에서 시의 느낌을 파악하게 된다. 색은 지극히 시상 속에 숨겨져 있는 관찰자의 다양한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밝은 색은 긍정적인 마음을 나타내는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반면 시인 이소연의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는 검은 표지 ,검은 색 뒤에 가려진 깊은 우울의 장막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삶보다는 죽음을 시로 표현하고 있으며,단어 하나 하나 무장 하나 하나 읇으면서 ,시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조금 애먹었다.그건 하나의 시를 한 번이 아닌 여러번에 걸쳐 읽어보라는 시인의 의도였을 것이다. 특히 시인은 '철'에 대해서 일곱개의 시를 남겨 놓았다.어릴 적 남겨놓은 흉터들은 철과 관련된 흉터였으며, 철은 소녀의 성장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철은 다양한 의미로 쓰여지고 있었다.차가운 것,쇠, 녹슨 것, 돌이켜 보면 시와 시인의 경험을 온전히 녹여내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그렇지만 그것을 녹여낼 수 있을 때 시는 더 확장될 수 있고, 시의 가치와 상징적인 은유를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