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은 자연에 가까워질 때 위로와 위안을 얻을 때가 많다.물가 위에 유유히 떠나니는 철세들, 대관령 목초지 위에서 푸른 초원위에 뛰어는 소들의 모습들 ,이러한 모습들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 엮여 있으며, 생명에 대해 소중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소를 가축화 하였으며, 소의 삶과 인간의 삶음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되었고, 소를 우리에 가두어 키울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우리는 소가 순하면서도 거칠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소의 코두레에 워낭을 달았던 이유는 소의 거침에 대해 인간이 통제를 하기 위해서 거대한 몸집의 가장 약한 부분에 사물을 끼워서 소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식물 중에서 나무가 버릴 것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가치관이 소에게도 적용되는 이유이다.심지어 소의 머리에 돈을 끼워서 제사를 올리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며, 다양한 관점에서 소의 유익함을 바라보게 된다.
아일랜드 작가 존 코넬은 소가 주는 이익으로 소의 부산물인 우유를 주시하고 있다. 인간의 모유 역할을 하는 우유를 상시적으로 공급하는 소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인간의 역사와 소의 역사는 같은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여기서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소의 역사 속에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이다.그 폭력성을 인간 스스로 자각하고 살아갈 수 있을 때 소에 대한 소중한 생명의 가치,자연으로서의 가치를 인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소에게 필요한 것은 먹이였다.인간은 소를 정해진 기간도안 키워 가면서 소를 상품화한다. 때로는 같은 종끼리 선택 교배를 통해서 소의 야생성을 지우고,가축화하는데 있어서 용이한 선택을 시작하였다.과거 동굴 벽화 속의 소의 모습과 다른 아일랜드의 레드 소가 탄생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특히 인간에게 소의 존재이유는 소가 생명이면서,상품이기도 하다. 저 푸른 초원위에 소를 방목하면서, 자식을 키웠던 부모들은 이제는 협소한 공간 위에 한 장소에 소를 가두어 키우게 된다.공장식 밀집 구조에서 소를 가두려면, 소 우리가 튼튼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를 도축하기 직전 거대한 화물차가 소우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시설이 완비되어 있어야 한다.그 과정에서 소의 예민함이 드러날 수 있으며, 소가 가지는 폭력적인 행동과 소리는 그 과정에서 불가피 하다. 특히 소가 우는 소리, 무엇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면,소의 기운 뿐만 아니라 영혼을 느낄 수 있다.소를 도축하기 전에 소를 한 쪽으로 몰다가 다친 농민들이 부지기수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나치와 히틀러는 소를 악용하였다. 인간이 개념적으로 만들어낸 우생학은 소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개념으로, 우수한 종을 서로 교배시키면서, 건강한 소,튼튼한 소를 되물림해왔던 소의 교배 과정들을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게 되었다.그 과정에서 우수한 아리아인을 만들고 싶었던 히틀러의 삐뚤어진 욕망은 인간의 삶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보다시피 인간의 삶은 히틀러의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인간은 소를 가축화하였고, 일방적인 관점에서 소와 동거동락하게 된다.그래서 인간은 일방적으로 소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으며, 소의 삶을 인간이 전부 결정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일방적인 것은 결코 없다는 것을 존 코널의 저서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소의 부산물인 젖이 인간에게 우유로 바뀌면서,인간의 모유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그 과정에서 인간의 삶은 과거보다 건강해졌고, 전염벼에 취약하게 된 이유, 사회적인 변화가 점차 바뀔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여성의 인권과 삶이 과거보다 더 나아질 수 있었던 이유도,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며,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었으며, 과학과 문화,사회 곳곳에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질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성이 해 왔던 일들을 소가 대신할 수 있었고, 인간의 삶이 자연에서 벗어나 도시화가 진행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