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왜란과 호란 사이 - 한국사에서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
정명섭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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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폐쇄적인 농업국가였다.따라서 평상시에도 농사를 망치게 되면 굶주림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임진왜란은 7년에 걸쳐 진행되었고,한반도 거의 모든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전란 속에서 농민들은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한 채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했다.간신히 농사를 지었다고 해도 조선군과 명군, 그리고 왜군에게 빼앗기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40-)7


광해군은 개혁군주라는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는 별다른 개혁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오히려 쌀로 모든 세금을 내도록 하는 획기적인 세금 징수 방식인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반대하고 궁궐의 증축에 지나치게 힘을 기울였다.재위 기간 내내 옥사를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렸다. (-125-)


인조는 광해군의 적폐를 없애겠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집권한다. 하지만 인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변한 것은 벼로 없었다.부정부패를 저지른 광해군의 측근들은 반정에 참여한 공신들로 대체되었다.그러나 인조를 비롯한 반정세력들은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겠다는 것보다 정권을 지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그래서 쓸데없는 의혹에 집착해 이괄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으며, 남이홍 같이 충성스러운 무장조차 군사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208-)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홍타이지는 1636년 12월 2일 친왕들과 패륵들을 이끌고 출정한다.팔기군의 주력은 물론이고, 몽골군의 항복한 명 출신 장군들까지 참가한 원정군 규모는 댛략 12만 정도로 팔기군 7만, 몽골군 3만,그리고 공유덕과 경중명이 이끄는 명 출신 군대 2만 명이었다.약 3만 정도를 동원했던 정묘호란 때보다 네 배나 넘는 규모였으며, 홍타이지가 직접 이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280-)


전영갑이 화를 내자 홍한수는 씁쓸하게 웃었다.자신이 후금군에게 붙잡혔던 안주성 전투엣거 남이홍이 한 얘기가 떠올랐던 탓이다.최씨는 시신들이 낭떠러지에 산처럼 쌓여서 밟고 내려갈 수 있을 정도라는 빈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얘기까지 하고는 돌아갔다.한숨을 쉰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봤다. (-322-)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에 시작하여, 1598년 11월 19일에 종식되었다.그리고 38년 뒤 1636년 12월 9일 후금이 조선으로 쳐들어와 병자호란이 조선 본토에서 발발하게 된다.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안주성이 후군 군사에 의해 점령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 속에서 보앗듯이 삼전도 굴욕의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이렇게 아이러니한 현상들을 보면 조선 팔도의 입지적인 지정학적인 위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고, 전쟁의 목적은 어디에 있고, 우리는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바로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물론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전쟁이 치뤄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강자의 입장과 약자의 입장은 서로 엇갈리기 마련이다.특히 조선은 왜군과 명나라 사이에 끼여 있었으며, 중국 본토는 후금과 명나라가 양분하고 있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조선의 왕이 되면서, 임진왜란의 휴유증에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시행하게  된다. 광해군은 이런 조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중립적인 외교젗책을 시행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친명배금 정책을 취하게 된다.여기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에 조선의 임금은 광해군이었으며, 그 당시의 조선의 왕과 그 주변인물을의 인식과 자각이다.즉 그들은 전쟁에 대한 인식이 요원하였고, 전쟁을 바라보는 기준이 모호하였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후금이 조선에 들어온 목적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그건 일제가 한반도를 율린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지금 우리의 실정을 보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복잡다단한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즉 지금을 광해군 시대로 되돌려 본다면, 후금이 중국 본에 해당되며, 명나라는 미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더 나아가 지금 우리가 돈의 관점으로 보면 친중 성향을 지기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친미배중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걸로 비추어 볼 때,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 정확한 외교정책을 추구하고 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과 인조로 권력 교체가 이뤄지는 17세기 조선의 현주소를 보면,조선의 신하들은 친명 정책을 원하였다.반면 광해는 명나라보다는 후금과 함께 항는 것이 조선의 국익으로 볼 때 더 유리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대신들의 생각은 광해와 달랐다.실리를 원했던 광해와 명분을 추구했던 대신들이 충돌하게 된다. 지금으로 보면 광해를 지지하고, 그의 선견지명을 칭찬하지만, 조선시대 그때의 시점으로 본다면, 광해의 선택이 반드시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오판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거다. 이 책을 보면, 우리의 현주소를 예측할 수 있고, 우리의 정치적인 기준점을 다시 한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의 38년이라는 시간 속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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