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 눈뜨는 시간
라문숙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내 안에 고여 있는 시간들을 헤아려 본다
소녀로, 새댁으로, 젊은 엄마로 살던 기간을 지나 중년의 사람이 되었다.

그동안 흘려 보내버렸다고 생각했던 나의 시간들이 지금의 시제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4-)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심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진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한 것도 대처할 수 없는 당황스러움도 ,놓아둔다. (-8-)


커다란 책사을 넣어둔지 벌써 오래전이다. 펼쳐진 채 책상 위에 놓인 책은 며칠 째 페이짇가 거기서 거기다.집 안 곳곳에 읽고 있는 책들이 있지만 신기하게도 책상위에 반듯하게 놓인 책의 진도가 제일 느리다. 주부와 책상의 거리가 이렇게 멀구나 싶다.무 한 토막 잘라내듯이 하루에 몇 시간만 잘라내서 익고 쓰는데 사용하자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 방에서 내가 제알 많이 하는 일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기'디. (-61-)


그런 날들을 하루하루 지워가고 있을 때 받은 메일이었다.정신이 번쩍 들었다.재미있는 놀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그것도 1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니! 여러가지를 고려해봐야 한다니, 누군가와 생각을 맞추고 애기를 나누면서 1년 넘게 놀 수 있다니,하늘에서 튼튼한 동아줄이 내려온 것 같았다. (-109-)


남편과 아이에게 집은 물건과 같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집을 이용한 후 마음대로 나가버릴 수도 있다.그래서 그들에게 집은 편리하고 쾌적하고 편안하면 된다.그러나 주부인 내게 집은 그런게 아니다. 나는 때로 집이 힘들어 하고 우울해 한다는 걸 안다.집은 끊임없이 호소하고 보채며 종종 토라지기도 한다. 나는 종종 집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지만 며칠 떠나 있으면 집이 궁금하고 그립다.집과 내가 서로 닮아간다는 것도 안다. 끊임없이 가구를 옮기로 정리를 하는 이유도 거이에 있다.나는 여전히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고 싶다.그렇다.집은 곧 나다. (-130-)


버지니아 울프는 서른 세살부터 27년간 규칙적으로 일기를 썻다.1915년 1월 1일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그녀가 자살하기 나흘 전인 1941년 3월 28일에 끝이 난다.울프는 날자에 쓴 일기를 손수 묶고 제본해 스물 여섯권의 공책으로 남겼다.1953년에 남편 레너드 울프가 아내의 일기 가운데 문필 활동에 관련된 부분만을 추려내 단행본으로 출간한 <어느 작가의 일기>를 나는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두고 잠들기 전에 아무 곳이나 펼쳐서 몇 페이지씩 읽는다. (-170-)


해마다 가을이면 나는 구근을 산다. 튤립, 무스카리, 아리움,크로커스, 히아신스를 사서 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묻는다.물론 수선화도 심는다.구근을 사는 건 이듬해 꽃이 만발한 봄날들을 미리 사는 ㄹ일이다. 마당에서 선명한 색으로 물든 튤립 봉오리를 처음 보고는 어쩔 줄 몰랐다.햇살이 펴지고 정오쯤 되어 꽃잎을 활짝 연 튜립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240-)


사유는 무엇익도, 생각은 무엇일까...우리는 매일 생각하면서, 생각과 사유를 구별하게 된다. 사유의 적절한 사전적 의미는 나 스스로 모르지만, 나는 그 단어의 개념을 규정하고 싶어졌다.사유란 '현재 상황과 타이밍에 적절한 답', 즉 '적절한 생각'이다. 생각에 상황과 타이밍이라는 양념을 뿌리는 것이며, '적절한'이라는 형용사가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 적절한 상황이 아닌 경우 오답이 될 수 있고, 상황과 적절하게 딱 떨어진다면, 정답이 될 수 있다. 저자에게 책쓰는 행위는 일종의 사유였다. 책쓰는 것이 망설여졌던 저자는 소녀에서 새댁으로, 새댁에서 중년이 되면서, 책을 써야 하는 이유를 얻게 되었다. 주어진 삶과 인생에 대한 허무함, 자신을 위한 일종의 위로였다.1년동안 글쓰기 프로젝트는 책쓰기였으며, 그 순간을 놀이처럼 즐기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고, 가져야 할 것과 내려 놓아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좌불안석이었던 과거의 행동들에 대해서 이제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책쓰기는 글쓰기이다.그건 치열하게 글을 쓰고, 그 안에서 책을 쓰기 위한 소재들이 된다.책쓰기를 통해서 같은 대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매일 매일 일기를 쓰고, 27년동안 쓴 일기 중에서 간추려진 이야기가 한권의 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생각들이 압축되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남겨놓은 일기가 여러권의 공책이 되었고, 그 공책은 한 권의 책이 되었다.책을 구매하는게 어려웠던 과거의 우리의 모습은 어느새 그것이 사라지게 된다.책은 넘처나지만,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사라지게 되었다.참 아이러니한 현상이었고, 그걸 이 책 한 권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사유하면서, 나 자신을 위로하고, 나의 나이를 수긍하게 되고, 나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다.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걸,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하지 않는 것,그것들이 이 책 한 권 속에 담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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