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로드 7000km - 의열단 100년, 약산 김원봉 추적기
김종훈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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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장군은 1918년 스물 한 살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한 뒤부터 1945년 12월 조국에 돌아올 때까지 단 한 번도 일제에 잡힌 적이 없었던 독립혁명의 거두다.그러나 1947년 봄, 악질 친일파 출신 경찰 노덕술에게 끌려가 모욕을 당했다.수도청과 중부경찰서는 그런 장소다. (-39-)


야산이 동지들과 함께 의열단을 만들 때 황상규의 역할이 컸는데, 당시 황상규는 독립운동단체인 일합사와 풍기광복단, 대한 광복회를 거쳐 지린에서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위치였는데,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의군부에서 최연소 간부를 맡을 정도로 역량이 뛰어났다. (-102-)


단재 신채호는 당시 독립운동계에서 이미 크게 이름을 떨치는 인물이었다.게다가 철저한 민족주의자로서 아나키즘과 역사학자, 언론인으로서의 명성 또한 자자했다.약산과 의열단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입자에서는 자신들의 행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줄 최적의 인물이었다.1922년 12월 ,약산은 의열단원 류자명과 함께 베이징에 머물던 단재를 찾아가 요청한다. (-162-)


이후에는 결행의 연속이었다.1922년 10월 김상옥은 서울에 잠입한다.주목적은 사이토 총독 암살,그런데 이듬해 1월 12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사가 발생한다.바로 종로 경찰서 폭탄 의거,주인공은 의열단원 김상옥이었다. (-200-)


황포군관학교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동정진망열사묘원'이 있다.황포군관학교 학생 시절 전쟁에 참여했다.희생당한 김근제와 안태가 잠든 곳이다.두 사람은 모두 1926년 10월 군관학교 6기생으로 입학했다.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군사훈련은 받거나 혁명전쟁 중 희생된 것으로 추측된다.1928년 장제스는 당시 김근제와 안태를 포함해 당시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동경전망열사묘원을 조성했다.(-251-)


약산 김원봉은 밀양사람이다.그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하지만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서 약산 김원봉은 크게 다루지 않는다.빨갱이,공산주의자 프레임에 따라서 김원본의 독립 이력은 슬며시 지워지게 된다.이 책에서 약산 김원봉의 7000km의 여정길은 서울-평양-지린-베이징 -상하이까지의 거리이다.약산 김원봉께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제 경찰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 이동한 거리이다.그러나 약산 김원봉은 노덕술에 욕보이게 된다.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약산 김원봉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지금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역사적 갈등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특히 우리 사회의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는 친일 청산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약산 김원봉 선생의 길을 따라가보면 친일과 항일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다.서울에서 평양으로 그리고 지린으로 가는 여정 속에 자주 독립에 대한 염원이 숨어있었다. 1919년 의열단이 창설되고,100년이 지난 현 시점에 다시 의열단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기억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으면,역사의 과오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조금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들이 책 곳곳에 남아있었다.약산 김원봉 선생과 함께 해 왔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적인 관점을 느낄 수 있었으며, 황포군관학교의 실체도 이해할 수 있었다.시인 이육사의 독립운동의 발자취도 느꼈다. 왜 그들은 베이징을 거처, 상하이오,그리고 광저우로 넘어 갔는지 그 여정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들이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 왔던 이유는 독립을 위한 투쟁은 반드시 피를 부르기 때문이다. 피폐해지고,처량해질 수 있는 그 순간에 독립을 위한 염원이 절실할 때 생기는 정신, 약산 김원봉 선생의 정신을 깊이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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