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쟁실록 - 전쟁이 바꾼 조선, 조선이 바꾼 세계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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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을 받고 떠난 이종무는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도로 내려갔다.이종무가 거느린 병선은 경기도에서 10척, 충청도에서 32척, 전라도에서 50척, 경상도에서 126척을 동원해 총 227척이었다. 동원한 총 병력은 1만 7,285 명이었고 배에 실은 양식은 총 65일분이었다. (-42-)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결합해 세운 국가로 영토는 라오닝성,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중국의 동북 3성과 러시아의 연해주, 하비롭스크 지방의 아무르 주 등에 걸쳐 있었다.이는 여진족의 거주 지역과 동일하다. 결국 여진은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뒤 지속적으로 거란에 저항하여 발해의 부흥을 시도한 발해 유민을 통칭하는 용어다. (-66-)


삼포왜란 중에 조선과 왜구 양측의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우선 조선 측은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전소했으며 삼포 주변에 있던 수백 척의 함선이 모두 불타는 한편 관아는 아수라자이 되었다. 왜구의 경우 왜선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의 왜군이 참수되거나 죽었다.그리고 삼포 왜관이 머물던 거류왜인은 모두 재산을 버리고 대마도로 달아나야 했다. (-121-)


행주대첩에서 조선군이 대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여송은 평양으로 퇴각한 것을 후회했고, 한성으로 퇴각한 일본군은 조선군 2만여명과 행주산성에서 싸워 약간의 피해를 보았다며 히데요시에게 축소해서 보고했다. 그와 함께 남쪽으로 퇴각해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농성 작전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233-)


아민은 다시 대동강을 건너 예성강이 바라다보이는 평산까지 남하했다.한데 그 무렵 폭우가 쏟아져 대동강과 예성강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군대를 돌리기도 진격하기도 어려운 사정에 놓였다. 사실 후금군은 조선에 압력을 가해 굴복시킬 요량으로 군대를 동원한 것이라 너무 깊이 들어오는 것을 꺼렸다. (-289-)


우리나라에서 작년 겨울부터 흉악한 무리와 도둑의 부류가 무리지어 결탁하고 몰래 반역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마침 체포해보니 다른 나라 사람이 8명이나 끼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어느 곳으로 국걍을 넘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옷차림과 말하는 것은 중국 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간사스러운 여자로 가장하고 자취를 숨기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이 우리나라의 경내에 오랫동안 있었음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습니다. (-329-)


조선은 은둔의 나라이며, 전쟁의 나라였다. 고려 말 이성계는 여진족 토벌을 하였던 장수였고,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우게 된다.특히 여진족은 발해 유민으로서,우리에게 있어서 한반도 역사의 일부분이면서,, 한반도의 역사와 대척을 이루기도 한다.그건 발해의 역사를 그동안 우리 스스로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런 모습들이 우리의 역사 곳곳에 스며들고 있으며, 역사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다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전쟁 하면 먼저 떠오르는 전쟁이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치욕의 역사 혹은 영광의 역사로 들여다 보고 있다. 일본에 사람을 보내 일본의 현주소를 살펴 보았지만, 그 시대의 조선 정부는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상반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그건 전쟁이 가지는 속성 뿐만 아니라 전쟁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하나 하나 살펴보는 기회가 된다. 즉 임진왜란 당시 주류와 비주류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으며, 선조가 도망간 이유, 이순신의 전사, 류성룡의 징비록, 명나라의 입장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 임진왜란을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였다. 


여기서 보면 우리는 왜구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게 대부분이다. 세종 임금 때 임진왜란 토벌에 앞장 섰으며, 실제 일본 토벌이라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이 책에는 왜구에 대해서 우리가 왜구 토벌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명나라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있었다.왜구 토벌에 소극적인 조선을 명나라 황제는 서로 짜고 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그건 왜구가 한반도 뿐만 아니라 명나라 본토까지 침투하고 있었으며, 그만큼 왜구 스스로 노략질의 선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살펴 보아야 할 부분은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미국이다. 천주교 박해로 인해 우리는 프랑스와 전면전을 치루고 말았다. 천주교 박해를 노골적으로 자행하였던 1866년 고종임금때 병인박해는 방인양요의 원인이 되었고, 흥선대원군이 문호를 잠그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서구를 배척하고, 조선을 지키려는 그들의 모습들이 결국에는 한반도를 후퇴하는 또다른 이유가 되고 말았다. 전쟁이라는 당근책와 고통이 그들 스스로 최악의 수를 두었던 이유이다.이런 과정들은 향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한반도가 전쟁의 중심이 되어버린 결정적인 이유가 되고 말았다.


역사는 우리의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라 한다. 그 말은 우리 스스로 역사에 대해서 관찰하고, 과거의 한 장면이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특히 평화로운 세상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오래 될 때 우리는 전쟁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임진왜란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시적되었다. 세종임금의 왜구 토벌 이후 200년 가까이 평화로눈 삶을 살았던 조선의 기득권이 일본 사회의 면화, 그들의 우수한 과학기술이 조선땅을 유린한 것만 봐도 그러하다. 평화의 끝은 전쟁이며, 전쟁의 끝은 평화이다.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내것을 스스로 챙겨 나갈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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