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징비록 - 역사가 던지는 뼈아픈 경고장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 뜬 놈이 센 놈미다. 남들보다 앞서 눈을 뜨고 각성한 놈이 힘센 놈이다. 그 놈이 만드는 게 역사다. 정의가 이긴다면, 도덕 공부나 하고 살면 된다.우리가 원하는, 보고 싶어하는 그대로 역사를 바라보면, 역사는 그저 정의롭다.그러면 일찌감치 눈을 떠 힘을 키운 놈이 우리 역사를 압살해 버린다.늘 그랬다. (-7-)


자기 용맨을 과신하고 신무기에 대해 파악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대가가 부대원 몰살과 국가 패망이었다. 무장이 그러하건대, 문신들의 황당함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54-)


1741년 영조는 갑오정식 이후 설립된 모든 서원에 또 한 번 철폐령을 내렸고, 130년 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은 사액서원 47개를 제외한 모든 서원을 없애버렸다. (-71-)


조선에서는 모든 조서적인 가치를 옭아매는 철학, 성리학이 깊게 뿌리를 내렸다.그 모든 것이 1543년 그 해에 시작되었다. (-74-)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와미 은광 유네스코센터 전시장 초입에는 철포와 은과 회취법을 한 줄로 요약한 안내문이 걸려 있다.1526년 은광 발견, 1533년 회취법 도입, 1543년 철포 전래,안개처럼 조선 정치인들 손아귀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기회들이 나란히 적혀 있다. (-100-)


세종이 이룩해 낸 과학 기술 성과와 군사력은 100년 세월 동안 사라져 버렸고 조선 지도자들은 조선 땅에 거듭 들어왔던 철포를 외면했다. 철포를 만들 수 있는 자본, 은 또한 조선 땅 지하에 묻혀 버렸고 그 제련법은 일본으로 유출됐다. (-119-)


오사카 시내에 왜 서점이 가득했는지 ,오랑캐 의사가 왜 사람 몸 속을 들여다봤는지 조선 엘리트들은 궁금해 하지 않았다.일본 가는 곳곳마다 이층집이 즐비하고 집집마다 황금으로 치장을 하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유에 대해 알려하지 않았다.남두민도 , 신유한도 잘못은 없었다.그런 의사와 그런 학자를 대량생산한 성리학과 성리학으로 장난을 친 조선의 지식 권력 시스템이 문제였다.문명사적 각성을 불가능하게 만든 시스템이었다. (-149-)


아리타는 임진왜한 때 조선으로 출정한 나베시마 나오시케가 조선 도공을 끌고 와 만든 마을이다.산꼭대기에는 도조 이삼평 기념비가 서 있다.(-227-)


책 매매는 성리학에 반하는 사업 행위였다.성리학적 윤리를 담은 책들은 모두 국가에서 편찬하고 출판하고 유통시켰다.공식적으로 책을 사고파는 민간 서점은 존재하지 않았다.유학자에게 필요한 책은 국가에서 금속활자나 목판으로 찍어 '나눠줬다"(-303-)


가난한 왕국 국왕은 기어코 제국을 건설했다.가난하기 짝이 없는 제국 황제는 거듭해서 궁궐을 수리하고 불탄 궁궐을 다시 만들라고 명령했다.돈 들여 키운 군사는 황궁 수비와 치안에 투입됐다.백성 기름과 피를 쥐어짠 세금은 황실 주머니로 들어갔다.갑신년과 병신년에 죽여버린 개혁파 인재들은 돌아오지 않았다.전제군주 황제는 모든 것을 다 소유했다. 황제 눈에 든 근왕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서로 싸우며 '주식회사 대한제국'을 경영했다.참으로 허세였다. (-340-)


안빈낙도 하려면 나무늘보처럼 살면 된다.여러 나라 언어로 '나태하다'는 단어로 쓰이는 나무늘보는 세상에서 제일 게으르고 느린 동물이다. 근육량이 적어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해 동작도 느리게 진화했다.하루에 나뭇잎 세장만 먹어도 생존이 가능하다.대신 하루 18시간 자을 잔다.전력질주하면 최고속도는 시속 200미터다.근육도 없고 그나마 맛도 없어서 남들보다 사냥감이 될 일도 적다. 안빈낙도의 전형이다.선비다. (-374-)


내가 사는 영주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이 있다. 그리고 우리 지역에서는 선비정신을 강조한다.여기서 내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지역에서 강조하는 선비정신의 실체, 선비정신의 본질에 대해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선비정신의 본질은 지자체가 강조하는 '인성'이 아니라 , 이 책에서 언급하는 나태함과 안빈낙도였다. 선비는 조선시대 착취의 주인공이었다. 중중 때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만들어지고 난 이후, 조선에는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성리학 그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다.문제는 그 성리학을 받아들이는 사람, 주체가 잘못이다. 성리학을 조선시대의 주류의 시스템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상업이 배척되고, 농업이 발달한 이유가 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근대화 속도가 느려졌으며,세종 임금 때 우리가 자랑했던 조선의 과학기술이 등한시 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조선의 사회가 세종 임금 이후 중종 때까지 정체되어 있는 과정에서 일본은 서구사회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게 된다. 먼저 조선의 은을 채취하는 제련기술을 일본이 가져가게 되었고, 조선의 기술자들은 조선이 아닌 일본을 선택하게 된다. 그건 조선이 성리학을 도입하면서, 그들이 조선 땅에 설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조선의 엘리트층, 우리가 자란스럽게 생각하는 선비들이 조선의 현주소를 너무나 모르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그들은 조선시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였고, 시대의 변화에 역행하게 된다.그들의 허세는 자아도취에 빠져 들었고, 일본의 근대화를 남의 일처럼 치부하게 된다.일본은 일찌감치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의학기술 또한 흡수하게 된다. 서구의 종교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고, 나름대로 일본은 농업 뿐 아니라 상업 분야에서도 성장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렇지 못하였다. 조선의 지식인층은 우물안 개구리 마냥 그들 사이에 우월감과 열등감,허세에 도취되고 있었다.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남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못함으로서, 필연적으로 임진왜란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땋뜨리게 된다.


일본은 기세 등등하였다. 조선을 금방 삼킬 듯하였다. 돌이켜 보면 지금 우리는 임진왜한의 주동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욕하고 비판하지만, 임진왜란의 본질적인 문제는 조선의 지식인, 즉 선비의 자가당착적인 사고방식에 있었다. 그들은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서툴면서 자충수를 두게 된다. 일본은 치밀하게 계산하고 조금씩 조금씩 조선 땅을 삼키려 했지만, 조선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웠다. 선비정신을 강조하고, 소수서원의 가치를 강조해왔던 지역의 현주소가 이 책의 내용과 교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전히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근시안적으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는 점이다. 지금 한국의 지식인들 중에는 조선의 선비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이다.그래서 현재의 문제를 직접 깨닫지 못하고, 그들이 내놓은 대안이 현실과 접촉할 때 제대루 문제를 풀지 못하는 우려섞인 상황이 여전히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