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idnapping of Edgardo Mortara (Hardcover, 1st)
Knopf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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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유대인들은 무려 아천년 동안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왔기에 유럽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유대인 공동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뿌리내린 곳이 교황령의 중심,나아가 사실상 전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라는 지정학적 특성 덕분에 이탈리아의 유대인 가운데서도 그들은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다. (-100-)


모르타라 사건을 정치적 자산으로 써먹기에 사르데냐 왕국 수상이자, 주변 땅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영토로 합병시켜 이탈리아를 통일한다는 계획의 배후 조종자인 카밀로 카보우르 백작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카보우르는 모르타라 사건을 보면서 교황국가의 구시대성을 드러내줄 완벽할 도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227-)


"더 넓은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모르타라 사건은 피우스 9세의 깊은 종교적 열정은 물로느 대중의 인기와 여전히 공고했던 특권과 무엇보다 교황 세속지배권에 대한 프랑스 지지를 잃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명뱍히 자신의 임무라 믿는 것을 행하려 햇던 단호한 의지를 너무나 잘 드러낸다."(-325-)


본 법정은 재판장이 제시한 의문들에 대해, 가장 거룩하신 신의 이름으로,1858년 6월 24일 저녁 경찰이 유대인 부부 살로모네,일명 모몰로,모르타라와 마리안나 파도바니에게서 두 사람의 아들 에드가르도를 데려갔으며 이는 정부의 승인을 받은 행위였다고 평결을 내렸음을 알립니다. (-441-)


아버지가 살인 혐의로 감옥에 있고 어머니는 피를 흘리는 스물 세살 여인을 네 층 아래로 밀어 떨어뜨린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동안, 에드가르도는 가명으로 오스트리아의 한 정규수도참사회 수도원에 입소해 해맑게 잘 살아갔다.이듬해 그는 프랑스 푸아티에의 수도원으로 옮겨 신학 공부를 이억랐다.(-536-)


이 책은 이탈리아 역사의 하나인 이탈리아 해방운동이 통일해방운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여기서 이탈리아 역사를 잠시 들여다 보면,이탈리어 통인 운동과 리소르지멘토가 같이 등장한다.여기서 리소르지멘토는 한글로 번역해 보자면 '부흥'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은 이탈리아 부흥운동의 연장이며, 어떤 역사적인 변곡점이 되는 촉매제가 나타나 이탈리아 통일이 되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데이비드 I.커쳐의 논픽션 <모르타니 납치 사건>은 다른 관점에서 이탈리아사를 들여다 보고 있다.그건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시작은 이탈리아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그것을 펼쳐보기 전 로마의 상황을 보면 그 시대에 교회법이 현존하였고,교황의 절대적인 권위가 있었다.책에 등장하는 교황 피우르9세가 가지고 있는 권위는 세속적인 권위보다 높았으며, 무시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여섯 살 에드가르도 모르타나가 하루 아침에 교황에 속해 있는 로마 교황청 소속 헌병대에 붙히게 되었고, 하나의 촉매제가 되었다. 그 아이는 유대인 아이였으며, 그 당시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은 배척되었고, 무시되었음을 알게 된다;. 즉 카톨릭 지배 체제에 있었던 이탈리아 볼료냐에서 모르타라 가족앞에 일어난 우연적인 사건이 불불어럼 번지게 되었다.유대교를 믿는 가정에서 카톨릭 교인이었던 하녀가 에드가르도에게 가톨릭 세례의식을 하면서 시작된다.그건 그 시대에 변변치 않은 의료기술로 인해 , 에드가르도에게 행하였던 세례의식이 아이의 고통을 낫게 해준다고 생각하여서다.하지만 로마 교황청의 헌병대에 아이가 잡히게 되는 빌미가 되었고, 유대인 가정과 카톨릭 아이가 함께 살면 안된다는 교회법에 따라서 에드가르도는 납치되고 말았다.


어떤 촉매제가 불이 되기 위해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역사적인 불길도 마찬가지였다.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원인도 하나의 불씨에서 시작되었다.그것은 이탈리아 통일 해방운동도 마찬가지였다.그 시대의 정서와 맞물려 에드가르도의 납치사건이 일어났으며, 게토에 머물러 있었던 유대인 공동체의 반발을 일으키게 된다. 유럽 사회는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주의 운동이 있었고, 교황의 권위를 무너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각하게 되었다.에드가르도의 납치 문제가 점점 더 커지게 되었고, 구세대와 신시대의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그 과정에서,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분쟁, 더 나아가 그들 나름대로 어떤 행동이 있었으며, 에드가르도 납치 사건을 구시대의 유물로 생각하게 되었다.일종의 이탈리아 교황의 권위에 전면 도전하는 것이었으며,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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