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이 귀양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진짜진짜 공부돼요 15
김숙분 엮음, 유남영 그림 / 가문비(어린이가문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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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서파의 주장이 강해지자 정조도 어쩌지 못하고 천주교를 금지한다는 내용의 법을 만들었어요.이 무렵 정약용은 요한이라는 세례명까지 받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어요.공서파의 신하들은 정약용이 나라의 법을 어겼으므로 처벌 받아야 한다며 모함했어요.결국 정약용은 1790년, 벼슬길에 오른지 1년 만인 스물아홉의 나이에 충청도 해미(지금의 서산)로 귀양을 가게 되었어요. (-22-)


1810년, 정약용이 강진에 온 지 10년이 되던 49세 때, 19세 ,16세이던 두 아들 학연과 학유는 28세,25세가 되었고 손자 대림도 태어났어요.이때 부인 홍혜완이 바래고 해진 치맛감 여러 폭을 부쳐왔어요. 두피란 노을빛 치마라는 뜻이에요. 치마가 오래되어 붉은빛이 바래 노을빛이 된 거예요. 정약용은 치마를 잘라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시를 쓰고 서첩으로 만들었어요.그것이 하피첩이에요.(-70-)


우리와 친척이라 해서 끊지 못한다면 너희들도 큰 낭패를 볼 것이다.무릇 폐족끼리는 서로 동정하는 마음이 있어 서로 모르는 척하기가 힘들기 마련인데,그렇더라도 인간관계를 청산하도록 해라.서로 거래하다가는 결국 수렁에 빠질 수 있으니 부디 내 말을 마음에 새기도록 해라.(-103-)


너희들은 반드시 경학을 먼저 공부하여 밑바탕을 다지도록 해라.그런 다음 역사책을 읽어, 당시 잘 다스렸던 이유나 어지러웠던 이유 등에 대해 근원을 캐 보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 즉 실학에 마음을 두도록 해라.항상 모든 백성에게 혜탹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읽고 학문을 하여야 할 것이다. (-159-)


당파 싸움으로 조정이 시끄러웠던 영 정조 시대에 실학자 정약용은 남인으로서 자신만의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다. 명망높은 정씨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남다른 정치를 꿈꾸지만 현실은 정약용이 꿈꾸는 세상과 거리가 멀았다.정약용은 같은 남인에게 배신을 당하였고,해미로, 강진으로 귀향을 떠나게 되는데, 그 이후 정약용의 고행길이 열리게 된다. 고문을 받고 떠난 귀향은 고통스러운 여정이다.대명률이 의거하여 귀향을 떠났던 정약용은 결국 폐족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천주교도이면서, 국법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귀향을 떠난 정약용은 정약현, 정약전 또한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유교 정신이 사회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었던 그 때 당시,천주교를 믿는다는 건 국법을 어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상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시대엔 처벌 받는 사회였으며, 정약용 또한 예외가 되지 않았다.그렇게 이유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정약용이 선택한 길은 유배지에서의 남다른 독특한 삶이었다. 남아있는 가족들, 두 아들에게 편지를 쓴 건 삶에 대한 지침서이자 아버지가 보낸 지혜로운 삶이었다. 정약용은 홍씨에게서 낳은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효자가 되고,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하게 된다.자신이 겪었던 운명들을 자녀들도 겪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무언의 암시였다.형 정약전의 죽음, 그럼으로서 가문은 하루 아침에 폐족 신분으로 전락하게 된다.하지만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희망을 잃지 않았으며, 자신의 지적 사유물을 써내려가게 되었다.책 <정약용이 귀향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정약용이 남긴 저서를 기초로 하여 다시 쓰여진 책이며, 지금 우리 사회에 보여지는 불안과 걱정, 그리고 사회적 위기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유혹들에 흔들리지 않는 것, 친인척간에 공가 과를 구별하면서 처신해야 하는 이유가 이 책에 기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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