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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최후의 19일 - 하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허균의 집안이 어떤 집안입니까? 그의 아버지 허엽은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이면서 서산 대사와 친구였고, 큰 형 허성은 선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을 뿐 아니라 서인들과도 가까운 친분을 유지하였으며, 작은 형 허봉은 서애 류성룡,손곡 이달,석봉 한호 등과 호형호제하면서 사명 대사와도 친하지 않았소이까? 이런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허균은 아버지와 작은 형으로부터 학풍을 이어받았고, 큰 형을 통해 오성 이항복과 마음을 만났으며, 작은형의 친구 서애 류성룡을 통해 퇴계의 학풍을 ,손곡이달을 통해 성당의 시를 익혔고, 서산대사나 사명 대사로부터 불교의 정수를 배웠던 겁니다.(-42-)
"대감! 소첩은 매창이 아니어요.소첩을 통해 매창을 보시겠다면,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마세요.소첩은 이매창이 아니고 추섬이랍니다."
그제서야 허균은 이매창에 대한 그리움을 접고 열여섯 살의 기생 추섬을 발견했다.이매창을 많이 닮긴 했지만 추섬은 이매창보다 두뼘이나 더 키가 크고 앙증맞은 보조개까지 있었다. (-160-)
네 인생의 주인이 너 자신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너의 인생은 네가 만난 사람들, 네가 읽은 책들, 네가 본 사물들과 풍광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게다. 그리고 너 역시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고.(-227-)
"술에 취하는 데는 각기 적절함이 있는 법입니다.꽃에서 취할 때에는 해의 광명을 받아야 하고,눈에서 취할 때에는 밤을 이용하여 눈의 청결을 만끽해야 하고,득의에 의해 마실 때에는 노래를 불러서 그 화락을 유도해야 하고, 이별에 의해 마실 때에는 바리때를 두들겨서 그 신기를 장쾌하게 해야 하고, 문인과 취할 때에는 절조와 문장을 신중하게 하여 그의 수모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하고, 주인과 취할 때는 술잔의 기치를 더하여 그 열협을 도와야 하고, 누각에서 취할 때에는 여름철을 이용하여 그 시원함을 의뢰해야 하고, 물에서 취할 대에는 가을철을 이용하여 그 상쾌함을 돋우어야 하지요."(-287-)
"우선 대역 죄인 허균은 우경방, 현응민, 하인준, 김윤황을 오늘 당장 능지처참하시옵소서.그리고 원종, 봉학, 돌한, 추섬, 성옥 등도 살려 둘 수 없사옵니다."(-401-)
저작거리에 효시된 다섯 개의 머리가 장대 끝에서 일제히 흔들렸다.필운산을 넘어온 강쇠바람 때문이었다. 좌우로 벌려선 의금부의 군졸들이 길게 하품을 해 댔다.주위를 둘러싼 의금부의 군졸들이 길게 하품을 해 댔다. (-411-)
허균은 조선시대 금수저였다.그러나 그는 비주류였다.그가 가지고 인맥은 남들이 넘보지 못하는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횡보는 그것을 잘활용하지 못하였고, 조선기대 기벽의 대표인물로 남게 된다. 죽음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던 그의 기개는 지금의 시대적인 모습으로 보자면 때로는 무모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가 추구해왔던 정치와 삶의 방식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것인가에 대한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누릴 수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내려놓고, 자신이 뜻한 바대로 살아왔던 그의 삶의 방식은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 조선의 권력을 쥔 광해군에게 도전하였고, 그는 처참하게 깨지게 된다.
결과는 뻔하였다. 하지만 그는 무모했지만, 수는 있었다. 돌이켜 보면 조선의 아웃사이더 허균은 지금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실패했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았던 그 가치들, 그는 깨졌지만,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살아가기 위해서 결코 비겁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거, 허균의 삶의 방식을 김탁환 작가의 시선으로 다시 보고 싶었던 이유는 그 시대의 사회의 모습이 지금 우리 사회에 다시 반복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와 그 기득권에 항거하는 자들 사이의 시소 게임은 그렇게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진지한 고민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허균은 죽임을 당하였고, 머리는 효수되었다. 잔혹한 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그의 모습들은 많은 이들에게 자신이 주어진 것을 보존하면서 살아가면 결국 우리 스스로 도태된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혁명은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가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