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건네는 말
한경희 지음 / 북나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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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면 할머니는 그때 할머니가 아니었다.쉰을 갓 넘긴 아줌마였다. 열아홉에 엄마를 낳고 엄마가 스물셋에 나를 낳았으니 고작 마흔둘에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고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라고 여겼던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도 맨발로 비 오는 거리를 첨벙거리던 때가 있었고,좋아하는 동네 오빠를 보면 골목 모퉁이로 숨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그 자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좀 더 늦게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56-)


오늘은 아파하는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손 내밀고 싶다. 우리는 모두, 털어내지도 못하고 걸어가야만 하는 실발 속 굵은 모래알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이의 차가운 손을 꽉 잡아주고 싶다. 빨리 집으로 가서 이 비싸고 불편하기만 한 옷 먼저 벗어 버린 다음에.(-165-)


나도 이제 막대기를 꽂고 돌아가야겠다.저만치에서 큰 바람이 몰아쳐 온다. 몸이 휘청한다. 부디 저 바람이 불면의 밤들을 싹 훑어가기를,내 어둠의 골짜기, 나조차 갈 수 없는 그곳에 가서 엉겅퀴처럼 얽힌 상년도 쓸고 가주길.걱정도 시름도 남김없이 다 가져가 주길. 오롯이 나만 남게.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그래서 자유롭다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아무것에도 저당 잡히지 않는 자유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바람아 불어라.(-229-)


과 선배가 유명을 달리한 날이었다. 선배는 자취방으로 가던 길에 덤프트럭에 치여 즉사하고 말았다. 친구와 나는 화장장 벤치에 않자,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271-)


인간은 살아가고, 죽음을 언전가 눈앞에 목도하게 된다. 살아가기 위한 그들의 변화들, 내 삶과 누군가의 삶은 시간의 스펙트럼 안에서 동질적이면서, 이질적인 삶이 된다. 한권의 책 속에서 느껴지는 삶의 희노애락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살아가고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지 하나 둘 찾아나가게 되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견디는 일이며,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는 걸 지켜볼 수 밖에 없다.수필 <시간이 건네는 말>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시간'이다. 내 삶의 시간들 안에 보여지는 희노애락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고, 나가 보는 사람들을 챙기고 용서할 수 있다. 내 가까운 사람, 믿었던 사람이 내가 가진 것을 다 들고 간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30년동안 씹고 꼭 씹었던 건 그것을 잊지 않아야 겠다는 다짐에서 비롯된다.그것을 받을 수 없고, 잡을 수 없지만, 내 안의 상처의 생체기가 결국은 나에게 또다른 아픔이 될 수 있다. 결국 상대방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해서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고, 그 용서는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 안게 된다. 저자는 30년전 용서하지 못했던 그 사람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간직해온 30년간의 시간동안 가지고 있었던 그 마음이 느껴지게 되면서,그 사람도 죄책감을 가지면서, 시간을 견뎌왔다는 걸 느낄 때 용서하게 되었다. 수필을 읽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수필을 통해서 내 삶을 들여다 보고, 그 안에서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나의 부모님이 견디면서 살아온 삶의 스펙트럼을 나 또한 마주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고,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또다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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