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의 기록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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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씨가 다코 씨 일가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요? 말도 안돼요. 설명하다시피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응어리진 게 아니었어요.오카모토 씨는 물론 다코씨와 불편했겠지만 증오하진 않았을 거예요, 절대 ,일가족 몰살이라뇨. 그런 짓은....(-43-)


저는 다코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외부에는 누설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라도 저질렀나 하고 막연히 생각하기만 했죠.
"내 상사가 와세다 출신이잖아."
다코가 맥락도 없이 그런 말을 꺼냈습니다. 저는 의미도 모르는 채 맞장구만 쳤습니다.(-107-)


견해 차이야. 취직이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중대한 기로라고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지 않았다가 나중에 후회하기는 싫어.난 잘살고 싶어. 그러기 위한 노력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건 잔인한 것도 뭣도 아니야.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는 욕구라고 생각해. 오히려 노력해야 할 때 노력하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비난받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런 인간은 사회에 나가도 절대 성공하지 못해.(-235-)


누쿠이도쿠로의 <어리석은 자의 기록>의 원제는 '우행록'이다.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사실 원제에 더 익숙하다. 그건 누쿠이 도쿠로의 <우행록>이 그의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인간의 어리석음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다. 허구지만 절대적으로 우리의 현실을 비추고 있는 소설이며, 그 어리석음이 한 집안의 가족을 몰살시키는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다쿠 씨네 네 가족이 잔인하기 죽임을 당했던 이유는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이며, 누쿠이 도쿠로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한 가족의 죽음에 엮인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고스란히 노출시키고 있다.


소설은 특히하면서 묘하다. 우리의 열등감과 우월감을 동시에 드러나게 해 주며, 다쿠씨네 가족, 소설 속에서 다쿠 씨는 나쓰하라 씨로 불려지고 있으며, 나쓰하라는 결혼 전 이름이다. 게이오대학 출신 남편 나쓰하라 씨와 와세다 대학을 나온 하시모토는 결혼하였고, 남들이 보기에 잘 살 수 있는 커플이라 생각했다. 즉 한국의 기준으로, 현실로 비추어 보자면 연고대를 나온 부잣집 남자와 이화여대를 나온 미모를 갖춘 여자가 결혼한 셈이다. 가진 것 다 가지고 있었던 남자와 여자가 결혼했기에 남들의 부러움을 독차지 할 수 있었고, 그들은 그렇게 살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들의 해피엔딩을 묘사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불행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독자들 스스로 생각하고 성찰하게끔 만들어 주는 한편의 서사적인 느낌의 소설이다.


위선과 이중적인 모습들,그것이 다쿠씨가 가지고 있는 또다른 모습이었다. 미인이었고, 공부잘했던 여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하였고, 우아하였으며,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 여자와 다쿠가 결혼했으니 사람들은 그들에 질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서 그대로 따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약이 아니었고, 독이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춰진 욕망과 본능은 자신을 파괴할 뿐 아니라 타인마저 파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소설은 다쿠씨가 어떻게 죽었느냐가 아닌 왜 죽었느냐에 대해 초점을 맞춰 나가고 있다.


우발적이거나 계획적인 범죄냐 구별하는 것은 이 소설에서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동기는 어디서 시작하였냐이다. 그 잔혹한 범죄의 실체는 하루 아침에 그 누구에게 갑자기 나타나니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소설로서, 이 소설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건 그 죽음의 범인이 왜 죽였느냐가 아니라, 그 죽음의 원인이 죽은 당사자에게 있었다는 걸 독자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대부분 우리는 잔혹한 범죄가 있으면, 그 범죄의 원인을 가해자에게 올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범죄의 원인이 가해자에게도 있지만, 피해자에게도 일정 부분 있다는 걸 느끼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래서 더 불편함을 숨기지 못하게 된다. 즉 말과 행동의 가벼움이 결국 자신의 운명을 결정 지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잔혹한 우리의 현실을 내포하고 있는 소설로서, 공감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편의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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