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아홉이 되어서야 이 이야기를 꺼냅니다 - 박제된 역사 뒤 살아 있는 6.25전쟁 이야기
한준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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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우는 그 큰 낫을 들고는 서슴치 않고 성큼성큼 시체가 놓인 자리로 걸어갔다. 기색도 없이 낫을 들어 올렸다. 두 세 번 정도 낫으로 목을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근느 낫을 내리칠 때마다"악!" 하며 괴성을 질렀다.이윽고 시체의 목을 다 자른 그는 "으윽"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일어섰는데,그러고 나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참 동안을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목이 잘린 시체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은 이의 것이었다. (-46-)


정신없이 싸우다가 잠시 전투가 멈추었을 때는 혹시 다친 데 없나 하고 내 몸을 여기저기 훑어보았다. 다행히 부상당한 부위는 없었지만 온몸에 시체의 피와 살점이 더덕 더덕 붙어 있었다. 포탄이 폭발하는 동시에 시체 덩어리가 날아와 내 몸에 달라붙는 걸 알아차린 적도 여러 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전우들도 모두 나와 마찬가지였다. (-129-)


교통호로 가는 길에는 전사자들의 시체가 끝도 없이 펼쳐저 있었다. 교통호애도 시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그 바깥으로도 이곳저곳 나뒹구는 시체가 부지기수였다. 대부분 몸이 온전히 붙어 있지 않고, 살덩어리가 조각조각잘려 있었다. 눈만 돌리면 머리, 팔과 다리,창자 같은 것들이 나무에 걸려 있거나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151-)


전쟁은 끝났지만, 후유증은 남았다. 전장에서 너무 많은 포탄, 총탄 소리를 들은 탓에 이명 현상이 끊이질 않았고, 동상에 걸려 거의 썩다시피 했던 양 발가락에서는 발톱이 이상한 모양으로 자라고 그 자리에 꼭 썩은 곰팡이 같은 무늬가 생겨났다. (-192-)


저자 한준식님은 6.25 전쟁을 겪은 세대이다. 실제 전쟁에 참가하여 우리가 현재 언급하는 북한군, 즉 인민군과 대치하게 된다. 지리산과 백운산 일대에서 인민군 토벌에 나서게 된다. 내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스로 전장을 누비면서, 죽음과 지옥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전쟁의 현실적인 부분들이 이 책에 리얼하게 그려져 있는 이유는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전쟁도 동시에 말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에게 전쟁은 나가 남을 죽이는 행위이며 ,그 실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결코 전쟁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더., 그건 저자가 바라보는 전쟁은 끔찍한 상흔이며 휴유증이기 때문이다.


피가 온몸에 떡이 졌으며, 내 눈앞에 시신이 뒹구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아군과 적국은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람을 죽이게 된다. 총과 수류탄 뿐 아니라 손에 잡히는 살상무기들은 언제나 남의 목숨을 노릴 준비가 되었다. 농사를 짓는 낫을 들고 , 인민군을 죽여야 했던 그 순간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렇다. 스무살 전후 군대에 강제 징집되어서 맹호부대 11중대에 소속된 그 순간은 끔직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살기 위해서 식량을 감추었고, 살기 위해서 두꺼운 옷을 입었다. 그렇지만 전쟁은 전쟁이다. 아무리 내 몸을 보호해도 인간의 몸은 나약했다. 피가 온 천지에 보였으며, 시신은 여기저기 나뒹굴면서, 자신의 몸에 그대로 묻어났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죽음과 만나게 되면, 내가 살아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할 뿐 그 나머지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행위의 연속이었다. 물을 찾기 위한 몸부림, 하지만 물이 있어야 할 곳에 핏물이 있었다. 마실 수 없었고, 그로인하여 허망함과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배고픔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흙에 묻었어도,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이 묻었다 하더라도 살아야 하기에 털어내고 먹었다. 생존은 국군이나 인민군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포로로 잡힌 인민군에게 먹거리를 나누는 모습은 삶에 대한 회한이면서 연민이다. 살아야 한다는 것이 주는 공통된 목적들이 서로를 챙겨주는 이유였다. 또한 이 책은 전쟁은 결코 한반도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못 박아 놓았다. 전쟁이 아닌 평화를 요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역사 속의 전쟁이 아닌 리얼한 날 것 그대로의 전쟁의 현주소가 오롯하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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