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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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커졌고, 사람들은 사라졌다. 20년 전에 공원에서 장기를 두던 노인들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노인들은 이사를 갔거나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그들의 뒤를 잇달아서 늙은 , 다른 노인들이 장기를 두고 있다. 이 판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도 장기를 둔다. 다 같이 늙었다는 동류의싱이 작용하는 때문일 것이다. 노인들은 장기판을 들고 여름에는 그늘을, 겨울에는 햇볕을 따라서 옮겨 다닌다.(-22-)


목포항에 실려온 세월호는 '배를 째든 잡아먹든 마음대로 하라'는 표정을 세상에 들이대고 있었다. 첫날은 옆구리를 대고 있었는데, 며칠 뒤에는 방향을 돌려서 뱃머리가 부두에 닿아 있었다. 인간이 첨단기술과 거대 자본을 동원해서 만든 장치나 구조물은 제작과 운영에서 윤리성의 바탕을 상실했을 때 거대한 재앙이 되어서 인간을 향해 달려드는데, 이 때 인간은 이 재앙을 회피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다.(-93-)


시대의 엄마들을 생각한다. 그 엄마들을 생각하면 내 마음속에서 '엄마'는 거대한 군집명사로 더오른다. 1.4 후퇴대 어린 삼남매를 업고 끌고 서울서 부산까지 피난열차를 타고 내려간 나의 엄마, 성북천 목욕탕 오수에서 빨래하던 동네 엄마들, 시대의 웅덩이에 몸을 갈아바쳤던 모든 엄마들이 합쳐져서 내 고향의 '엄마'로 떠오른다.그 엄마들은 이제 거의 세상을 떠나고 없다.(-209-)


새벽 안개 속에서 공을 차는 젊은이들은 허연 콧김을 토해냈다. 이따금 그들과 어울려 공을 차며 놀았다. 살아 있는 생명의 힘들이 공 속에서 부딪치고 뒤섞이면서, 경험되지 앟은 새로운 공으로 튕겨져나갔다. 모든 공은 차이고, 또 차인 모든 궤적들과 더불어 태초의 공이었다. 공을 차면서 나는 앵의 신비에 놀랐고 공은 그 신비 속에서 명멸했다. (-358-)


겨울에 한강변 도심의 빌딩은 난방 증기를 구름처럼 뿜어내는데, 시베리아의 차가운 숲에서 온 새들이 그 구름을 배경으로 도심의 상공을 날아다닌다. 한강은 댐으로 막히고 강변도로로 갇혀서 이제 흐름의 힘을 잃고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지만, 강은 아직도 살아서 새들을 불러들인다. (-437-)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그 시대를 기록하고, 기억한다. 세대 차이는 그 기억과 기록의 차이였다. 같은 세대는 같은 경험들을 공유하고,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건 서로의 변화에서 시작되었고, 그 변화는 화합과 갈등의 촉매제가 되어졌다. 살다보면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갈등과 분열의 시작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데서 기인하고 있다. 서로의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상식에 대한 기준이 다름으로서 서로는 화합하지 않고 겉돌게 된다. 소설가 김훈은 바로 그런 자신의 시대상을 글로서 연필로서 써내려 가고 있으며, 누군가 해야 할 몫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다가올 숙명적인 사건들은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저자는 그런 것들을 주워 담아가고 있다. 수많은 죽음 속에서, 명멸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들을 기억하고 기록함으로서 , 그 삶과 죽음 속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다.


시대는 변한다. 소설가 김훈은 그런 변화를 들여다 보고 있다. 과거 이순신 장군이 마주했던 삶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겉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는 걸, 작가는 바로 그 변화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살아가는지 보고 싶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서로의 동질적인 감성에 도취해 함께 연대하고, 그들만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 군집화 되어졌으며, 그들의 삶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라믈은 그들의 행동과 실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치적인 목적에 대해서 특히 그러하다. 그들의 삶에 대한 두려움,그들의 과거에 깊이 들여다 보지 못하면, 그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의 고민들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온 이들만이 그들의 삶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이 책에서, 소설가 김훈만의 안목과 시선으로 인간의 또다른 모습들을 써내려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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