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제주도는 일제감점기를 통하여 많은 변화를 거친다. 제주도는 기미년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이미 5개월 전, 독자적으로 "법정사 항일운동'을 일으키기도 했고(서귀포 법정사의 스님들이 주동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축출과 국권회복이라는 양대목표를 세우고, 1918년 10월 7일 700여명의 도민이 무장 봉기한 사건, 이틀만에 집압되었지만, 그 봉기가 소리 없이 진행되었다는 것 자체가 제주도민의 특유한 단합심을 과시한다.),1930년대에는 238회에 걸쳐 연인원 1만 7천여명이 참가해 일제 식민지약탈에 저항했던, 역사 이래 여성 집단이 주도한 최대규모의 항일투쟁,"제주해녀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p203)


역사왜곡을 일삼는 일본을 보면서, 한국 사회는 그런 역사왜곡은 없었는지 되돌아본다면, 부끄러움을 먼저 느끼게 된다. 한국 사회에도 분명 역사 왜곡이 있었고, 그 내막을 정확하게 아는 이들이 적기 때문이다.그 단적인 예가 제주도 4.3 사건과 여순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1948년 이승만 정권때 일어난 사건으로 ,그들은 권력을 가지기 위한 역사적 왜곡과 빨갱이 프레임을 내세워 많은 제주도민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동족에 의해 자행된 제노사이드는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겐 눈에 가시였고, 그들을 축출해야만 자신의 목적을 잘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여운형과 김구는 축출되었고, 미군정에 의해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이런 가운데 제주 4.3 사건에서 서북 청년단에 의해 자행된 학살은 남녀노소를 가지지 않았다.그동안 역사 속에 감춰진 서북 청년단이 부각되었던 계기는 세월호 참사였다. 기득권은 그처럼 교묘하고, 잔인하게 민중들을 버렸으며, 민중은 피로서 자신의 삶을 지키려 했다.


제주 4.3 사건의 소요를 저지하기 위해서 여수,순천에 있는 제14연대를 제주도에 보내려 했던 이승만 정권은 그에 불응한 제 14연대에 반란이라는 죄목을 내세워 제거하려 했다. 그것이 여순 사건의 첫 시발점이었고, 여수 순천의 과거 임진왜란 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사실부터 짚어 넘어가고 있다.그건 여수와 순천 사람들의 지리적 특성과 사람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들의 과거의 모습을 보아야만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서 목적 달성을 하지 못했던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은 여순 사건을 여순 반란사건으로 규정해 제거하려 했다. 이처럼 역사적 아이러니는 알다시피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여전히 빨갱이 프레임을 들이대고 잇으며, 이승만 우상화 작업을 시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에 대해 이해하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과오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스스로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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