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의 돼지의 낙타
엄우흠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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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영감을 얻은 경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문방구를 차리기로 결심했다. 이때만 해도 그의 감각은 아주 녹슬지 않았다. 완구점, 서점, 만홧가게라느 말을 듣고서 순간적으로 문방구를 떠올리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작은 완구점과 작은 서점을 겸하는 문방구를 골라 인수했다. (p67)


경수는 고개를 돌려 민구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뽀얀 흙먼지가 일었고, 그 위로 아주 키가 큰 동물이 보였다. 기린처럼 길고 날씬한 목과 다리에 황소처럼 육중한 몸통! 낙타였다! 연갈색 낙타 한 마리가 터벅터벅 긴 다리를 흐느적 거리며 사거리를 가로질러 느티나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낙타의 등에는 돼지가 업혀 있었고 하얀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그 옆에서 걷고 있었다. 낙타가 느티나무 아래 멈추어 섰다. 민구가 달려가 소녀와 돼지, 낙타를 차례로 안았다. (p202)


동환이 갓 태어난 경수를 안고 있다. 장면이 바뀌어 아기 경수가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 이어서 분식집에서 이쑤시개에 순대를 꽂고 있는 일곱 살의 경수, 문방구에서 장난감 로봇을 조립하고 있는 여덟살의 경수. 금새 훌쩍 커 중학생이 된 경수가 선화의 손을 잡았다. 경수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선화는 마지막 힘을 다해 경수에게 말했다. 아빠는 아무 잘못 없어. 아빠는 마리를...도우려고 한 거야. 선화가 눈을 감자 저만치서 동환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고생이 된 선화가 동환에게 달려갔다. (p538)


소설의 주무대는 무동이다. 시골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무동은 재개발이 유력한 곳이었으며, 무동 지역 사람들은 재개발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 경수와 경수 아버지.경수 아버지는 전직 경찰관이었다. 하지만 경수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업 경찰관 대신에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제도적 울타리에 갇혀 있었던 경수 아버지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무능력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찰관이 아닌 새로 선택한 직업들 ,경수 아버지 손에 잡힌 직업들은 머물러 있지 못하였고, 순간 순간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성공을 꿈꾸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자영업을 해 보지만 손에 익숙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경수 아버지에게 주어진 운명이었고, 삶의 덫이 되고 말았다. 인생길을 잘못 들어가면 다시 돌아서 새로 시작하면 좋으련만, 경수 아버지는 그런 융통성이 없었다. 언제나 직진으로 갔으며, 그럴 때마다 미끄러졌다. 마리와 경수 아버지의 관계, 두 사람 사이는 묘한 관계로서, 또다른 문제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말은 경수 아버지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고, 경수 아버지는 '나 다시 돌아갈래'하고 세상에 울부짖고 싶었다.이 소설을 읽어보면 두꺼운 분량을 가지고 있다. 서민적인 우리의 1990년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소설 곳곳에 숨어 있었다. 때로는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묻어나 있었고, 그 시대에는 당연한 상식처럼 느껴졌던 그 부분들이 하나의 사건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씨줄과 날줄이 엮이면서 예상지 못한 상황들이 연출되고 말았다. 소설 속 주인공 경수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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