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끄러움그러다 돌연 발작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고 숨을 가쁘게 내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탁한 목소리로 악을 쓰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붙잡고 싣당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나는 베개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아버지의 손에는 나무둥지에 박혀 있던 전지용 낫이 들려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울음소리와 비명뿐이었다. 그런 후 우리 세 식구는 다시 부옄에 모였다. (p25)


어제 나는 매일 우리 집에 배달되던 일간지 <파리-노르망디>의 1952년분을 열람하디 위해 루앙 고문서 보관소에 갔다. 그해 6월의 신문을 들추는 순간 불행을 벌 것만 같아서 지금껏 엄두를 내지 못하고 미뤄왔다. 계단을 올라갈 때에는 끔찍한 약속장소에 가는 느낌이 들었다. (p41)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사교성이었다. 단순 솔직하고 공손해야 했다.'응큼한 '아이들,'사사건건 시비를 거는'노동자들은 타인과의 대화에서 지켜야 할 정당한 법칙을 위반한 사람이었다. 고독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칫 '곰'으로 취급할 정도로 무시당했다. (p72)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이 부끄러움의 표식으로 변했다. 마당의 오줌통, 함께 자는 방,어머니의 손찌검과 거친 욕설, 술에 취한 손님들과 외상으로 물건을 사는 친척들, 술에 취한 정도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알고 월말이면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는 우리 삶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 오직 이 인식만으로도 내가 사립학교의 무시와 경멸의 대상인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p137)


한권의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저자의 내밀한 경험에 기반을 둔 소설이며, 이 책의 제목이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설이지만 에세이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이 소설이 저자의 경험에 우러난 이야기여서 현실과 비현실을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독특한 소재와 독특한 이야기, 100여페이지의 짧은 책 한권에서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나는 이 책을 사실 그대로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소설 속 이야기가 내가 들은 이야기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나의 외삼촌과 나의 외숙모 이야기가 이 소설 속 이야기와 겹쳐져 있다. 소설 속 주인공과 부모님의 관계, 아빠는 왜 엄마에게 전지용 낫을 들고 죽이려 했던 것일까에 대해서 되물어 보자면, 그것이 그의 삶의 궤적 속에 누군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군가 해왓던 행동들을 학습하게 되고, 그것을 모방하려는 성향이 짙다. 주인공의 아바가 낫을 들었던 이유도 아빠의 주변 인물들이 그러한 행돋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전지용 낫을 휘둘렀고, 그로 인해 아내가 울부짓게 되는데, 소설 속 주인공이자 딸은 그로 인해 1952년 6월 15일에 갇혀 버리게 된다.


나의 외숙모도 그러했다. 외삼촌은 술을 먹으면 동네를 휘젓고 다녔으며,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시골에 있는 나무와 풀을 베는 낫을 휘둘렀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내 외숙모도 예고되지 않은 공격적인 행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피하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일어날 때 공격의 주체인 남자에게 화살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의 엄마의 행동을 주목해 보면, 이유없는 공격적인 행동들은 항상 원인의 주체가 있으며, 결코 이유없이 행해지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남편의 폭력 뒤에는 아내의 욕설이 있으며, 남편은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힘을 분출시켜 버렸다. 공교롭게도 자신이 다니는 동선에 낫이 있었고, 그게 무기가 된 것이다. 물론 나의 외삼촌과 외숙모의 관계도 소설 속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골에는 언제나 가까운 집 지척에 낫이 있었고,농약이 있으며, 그것을 분출할 수 있는 동기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힘든 농사일과, 농사를 지었음에도 수주에 쥘 수 있는 돈이 한정적이며, 빚에 허덕이다가 현실에 대한 분노들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푸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이 1952년,그 시점에 갇혀 버렸다.그건 트라우마의 한 형태이다, 분명 주인공은 아버지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인해 그 순간의 기억들을 놓쳐 버렸을 것이며, 그것들은 무의식적인 공간에 채워지게 된 또다른 이유였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포의 실체가 극에 달하는 순간 사람이 그 때의 기억들을 잃어버리게 되고, 소설 속 주인공은 12살의 기억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주인공이 자신의 기억들을 찾기 위해서 과거의 신문들을 들추게 되고, 그 때 일어났던 사건 사고들을 기억하려고 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남들은 기억해도 그만 기억 안 해도 그만인 순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억에 대해서 집착하게 되는 또다른 이유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