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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야 - 2019년 제15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다이앤 리 지음 / 나무옆의자 / 2019년 4월
평점 :
알프레드 가족은 지극히 흔하고 적당히 번잡한 지역에서 저녁을 먹은 뒤 적당히 흔하고 지극히 조용한 주택가가 있는 코퀴틀람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p15)
내가 정지해 있어도 세상은 돌아가고 , 언젠가는 그 세상에 내가 어설프게나마 맞춰지거나 그 세상이 나를 위해 슬그머니 맞춰 줄 것을 안다. 동네 어귀 신호등의 빨간불도 더는 깜빡깜빡하지 않는 것처럼, 깜빡깜빡은 영원한 정지가 아니라 잠정적 보류다. 모든 것이 닮아서 이 세상은 지루한 동시에 재미있다. 그날, 밤새도록 눈이 내렸고 우리는 훈훈한 침실에서 고요한 잠을 잤다. (p78)
견고하던 유리 장벽이 산산히 깨지더니 나를 살펴보던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되었다. 변호해야 하는 아빠를 없애고 설명해야 하는 나를 없앤 그곳에 여덟 살의 내가 있었다. 자그마한 눈이 반짝이는,채워지지 않아 늘 허기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서 늘 답답한, 겁에 질려 울먹울먹하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p173)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메시지로 이해하지 않았으면 해. 그저 현상으로 이해했으면 해. 당신이 본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건 단지 보이는 것이지 보고 싶은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았으면 해.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은 달라. 메시지가 아니야. 현사일 뿐이야."(p226)
교통사고 후 나는 너무나 많은 약을 먹어 오고 있었다. 종류는 매번 달랐고 강도는 매번 높아졌다. 이것의 끝이 건강인지 허약인지 헷갈릴 만큼 많은 양이었다. 복용한 것 중에 배출되지 않고 몸에 쌓인 것도 있을 것이다. 고통과 치료제는 내 몸 안에서 공생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의 자리가 크기 않기를 바랄 뿐이다. (p260)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 예기치 않은 변수로 인하여 삶의 전환점과 겹쳐지는 경우가 있다. 나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고통의 실체는 우연히 일어난 어떤 사고로 인해 시작되었으며, 그 고통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있다. 그 고통이 내 앞에 놓여질 때 자신은 어른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아이가 되는 불가피한 상황이 연출된다. 예고치 않은 눈물과 절망감을 느끼게 되고, 우물 속에 빠져 버렸지만 거기서 나올 수 없는 그러한 순간을 목도하게 되는데.이 소설은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느꼈던 고통에 대해서,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며, 고통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나가고 있다. 자신의 고통의 깊이가 커질수록 그 고통의 근원을 찾아 나가려는 화자의 욕구는 커져가게 되고,고통의 크기는 약의 갯수와 비례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알프레드 가족이다. 알프레드 가족에게 일어난 교통사고는 대형 사고도 아니었으며, 겉으로 보기에 큰 사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고로 인하여 주인공의 삶은 바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교통사고의 순간을 잊지 못함으로서, 주인공 스스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감을 활용해 그 교통사고를 재현하고 있었다. 교통사고 순간 느꼈던 차 바퀴가 긁히는 소리가 실제로 나타나지 않지만, 주인공의 무의식에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무의식적인 현상들이 주인공의 삶을 가둬 버렸으며, 일상적인 삶이 멈춰 버리게 된다.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을 자지 못하게 되고, 약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주인공 앞에 놓여지게 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무의식의 실체에 대해 주인공의 기억에 현전하고 있다. 그 기억에 대해서 ,카세트 테이프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반복적으로 듣는 것처럼, 소설 속 주인공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늘어질 때까지 주인공의 삶을 억압하고 살아간다. 더 나아가 그 기억은 과거와 현재의 또다른 고통들과 교차되어서, 주인공의 삶을 바꿔 놓게 되는데, 그 고통은 시간이나 장소에 관계없이 예고하지 않는 상태에서 나타나서 주인공 스스로 지치게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우리는 이처럼 현대의 의학으로는 풀 수 없는 무의식적인 고통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소설은 바로 그 무의식적인 고통을 저자의 자전적 소설로 재현해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