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의 힘 - 꿈을 팔았으니 AS는 확실하게, 그리고 소소한 여자 이야기
고선윤 지음 / 스타북스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사람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도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실린 주소지로 전화를 걸면 열에 일곱은 부모님이나 노처녀 동생이 전화를 받는다. 30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시집가서 남편의 성씨를 따라 무엇으로 바뀌었고, 전화번호는 이러이러하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러면서 나를 기억하는 친구 어머니는 아직도 나를 '코짱'이라면서 시간을 초월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 몇 십년이 지나도 동네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자전거 타이어 펑크 때우러 다니던 자전거방에는 이제 백발의 할아버지가 된 주인이 나를 기억한다. 교복을 맡기러 다녔던 세탁소 건물은 작은 빌딩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1층에는 여전히 그 집 주인이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나를 반긴다. (P38)


나는 일본고전문학, 그중에서도 <이세모노가타리>라는 작품을 전공한 사람이다. 천 년전 교토를 중심으로 화려한 귀족의 시대가 펼쳐진 헤이안 시대, 풍류를 즐기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이야기에 "오늘 밤 꿈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여자의 글을 받고 남자가 답가를 보내는 것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당신을 너무 많이 생각한 나머지 나의 몸을 빠져나간 혼이 당신께 보인 것 같구려. 내 모습이 보인다면 내 영혼이 다른 곳에서 헤매지 않도록 그대 곁에 꼭 묶어두시오."(P145)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마음에 욕심이 차오르면 곤궁했던 시절을 떠올려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이요 분노의 적이라고 생각해라.이기는 것만 알고 정녕 지는 것을 모르면 반드시 해가 미친다. 오로지 자신만을 탓해야 한다. 남을 탓하지 말라.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자기 분수를 알아라. 풀잎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진다."(P157)


작고 작은 이 사람이 상처 없이 살아가는 방법은, 작고 작다는 사실을 알고 작게 작게 살아가면 된다. 작아서 그 서러움에 크게 몸짓을 하는데, 그게 얼마나 추한 짓인지 반백년 살아온 시간이 말해준다. 나의 몸짓이 폭력이 아니라 다독임이기를, 나의 말이 고함이 아니라 속삭임이기를 기도하다. (P186)


작은 울림이 전해져 왔다. 저자의 삶의 궤적 속에 숨겨져 있는 그 속삼임이 나의 내면 속의 호수 저 너머의 파동을 흐트려 놓는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내 앞에 놓여진 무형의 가치들에 대해서 나는 그 제한된 조건 안에 놓여진 사물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더 깊이 사유하게 되고, 얼마나 더 깊이 관찰하였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 보고, 성찰하면서,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부끄러움과 반성으로 이끌어 가게 해 주었다. 이 책에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고유의 가치들, 저자가 살아온 그 반백년의 시간들은 허투로 지나간 것이 아니었음을,그의 글과 문장, 단어 선택에서 느낄 수 있게 된다.


조센진이라 부르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경계선에서 양 다리를 두 나라에 걸쳐 놓았다. 그럼으로서 한국에서는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꼈고, 일본에서는 한국에서의 정체성으로 채워지게 되었고, 그것이 저자의 이중적인 정체성의 실체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혼란스러웟으며, 더 많이 사유하게 되고, 더 많이 관찰한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치열하게 관조함으로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찾아가고 있었다. 위로라는 것은 나 스스로 느껴야 비로소 위로를 얻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행복에 대한 본질적인 가치를 느끼게 되면, 그 행복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우리는 비로서 분주하게 움직이게 된다. 저자는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삶의 방식들을 우리에게 솔직하게 말함으로서, 자신의 상처입은 속살을 슬며시 꺼내 놓음으로서 공감과 위로를 동시에 얻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경험이 주는 따스한 그 무언가가 내가 살아나갈 의미를 스스로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 그것은 내 주변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 줄 수도 있다. 변화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 속에서, 나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 그 무언가를 찾게 된다면, 의지하게 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책 <허세의 힘>을 쓴 고선윤씨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통해서 경험과 지혜를 동시에 얻게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