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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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법원장이 법정 방청 돌고 계시많아. 민판사가 공시최고 재판하는 법정에 방청하러 들어갔다가 퇴정당했대. 재판에 방해된다면서."
충격이었다. 난 숨을 헉 들이마셨다. 민지욱이 이 정도일 줄이야. 법원자의 법정 방청은 몇 해 전부터 슬금슬금 법원행정처에서 마련한 제도 아닌 제도였다. 법원장이 한번씩 판사들이 법정을 돌면서 재판 진행하는 모습을 보고 법정언행이라든지 재판 진행 방식을 체크한다는 명분이었다. 판사들이 질색하는 행사였다. 수업에 교장이 참관하는 걸 교사들이 좋아할지를 생각해보면 자명해진다. (P77)


하지만 민지욱은 물러서지 않았다.
"유죄로 보기 어려운 정황도 많이 있습니다. 법의학자 손현상은 질식이 일어나고 팔 분에서 십 분이 경과하면 심장박동이 회복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준호는 나중에 심장박동을 회복했지요. 그걸 보면 이준호가 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질식한 때로부터 팔 분에서 십 분 이상은 지나지 않았을 거라는 추정이 성립됩니다. 그렇다면 김유선은 이준호가 질식 증상을 보이자마자 모텔 프런트에 연락하고 응급조치를 요청했다는 얘깁니다. 그녀가 살인자라면 이렇게 할 리가 없습니다. 만에 하나 이준호가 살아나면 계획이 물 건너가는 건 둘째치고 자신이 살인자로 지목될 판이니까요. 김유선이 애당초 이만큼 위험한 후에 연락을 취하든가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도록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습니다."(P126)


흥미로운 재판과 법에 관한 소설 한편을 펼쳐들었다. 현직 변호사 도진기님께서 쓴 장편 소설 <합리적 의심>은 법률용어이며, 재판에서 법의 심판을 받을 때 그들이 주로 쓰는 법률적인 용어이다. 재판에서 판사가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와 일반인이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큰 차이를 보는 그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합리적 의심' 때문이며, 어떤 잔인한 사건에 대해서 그 사건의 용의자가 적은 형량을 받을 때 우리가 분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도진기의 장편 소설 <합리적 해석>을 통해서 치밀하게 분석해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전체 스토리는 '젤리 살인사건'이다. 주인공 이준호는 젤리를 먹다가 질식해 죽었으며, 용의자로 지목된 이는 이준호의 여자친구 김유선이다. 자칭 언론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보험사기의 일종이며,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바꾸려 하는 인간의 밑바닥 인생을 그려내고 있으며, 이준호의 죽음 뒤에 숨겨져 있는 법과 제도의 헛점과 절차적인 오류를 들여다 보고 있다. 사실 이 소설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보험사기라 부르는 '젤리 살인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이다. 특히 '젤리 살인사건'을 심판해야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현민우 부장판사와 정남희 우배석 판사, 민지욱 좌배석 판사가 한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논리적으로 바라보고, 법적인 해석을 따르는지 눈여겨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소설에서 특히 눈여겨 보았던 건 민지욱 좌배석 판사이다. 세명의 판사중 재판 경력이 가장 짧은 민지욱 판사, 하지만 재판을 행하는데 있어서 법률적인 지식은 두 명의 선임 판사에 비할바가 아닐 정도로 출중하다.자신의 인생 모든 걸 법과 정의에 매진할 정도로 민지욱 판사는 보수적이면서도, 고집스러운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재판관으로서의 모습은 자신감 넘치면서도 인성에 있어서 뭔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다. '젤리 살인사건'에 대해 현민우 부장 판사는 유죄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나머지 우배석판사와 좌배석 판사는 논리적인 판단에 따라서 무죄를 주장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서 곤란한 처지에 놓여진 이는 바로 현민우 부장판사였다.


이 소설은 재판과정 하나 하나가 세세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현민우 부장판사에게 할당되는 수십건의 사건 중 하나로 치부될 수 있는 '젤리 살인사건'은 현부장판사에게 있어서 골치 아픈 사건 중 하나였다. 재판에 있어서 형평성을 고려하면서, 증인들을 통해 유죄이냐, 무죄이냐 판가름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누군가의 인생을 판가름 할 수 있는 그 중요한 순간에 재판관의 선택 하나로 결정되는 그 현실이 법에 대한 신뢰와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중한 자세로 재판에 임하는 세명의 판사는 각자의 입장과 생각에 따라가고 있으면서, 자신의 논리적인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 소설은 상당히 논리적인 서술 구조를 견지하고 있으며, 주인공들은 감성적인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또다른 헛점과 약점이 되고 있으며,중요한 재판 하나를 망쳐 놓는 결정적인 사유가 되고 있다. 소설은 바로 재판에 있어서 절차와 규칙 너머의 우리들의 현실을 비추고 있으며, 그들도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논리적이면서도 그 안에 사람으로서 갖춰야 하는 요소들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우리 사회에서 법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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