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 특서 청소년문학 6
박상률 지음 / 특별한서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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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에 올라온지 얼마 안 된 날이었다. 긴 생머리의 그녀가 출석부와 영어 교재를 가슴에 살폿기 안고서 교실로 들어섰다. 미리 돈 소문으로 원어민 영어 교사로 오는 이가 젊은 여선생인 줄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는 교사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여대생 모습이었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많은 아이들이 탄성을 냈다. 그러나 나는 탄성을 내지 못했다. 그녀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숨이 탁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숨막히게 했다. 숨이 막혔다. 여자인 내가 여자를 보고서.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p104)


나는 안다. 나도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녀와 달리 학생신분이라는 것을.그러나 그런게 무슨 소용인가? 이 세상을 살면서 엄마에게서 못 느껴보던 ,아니 또래의 다른 여느 친구에게서도 못 느껴보던 그 무엇, 그 무엇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대상이 여자든 남자든 나이가 들었든 안 들었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p107)


이렇게 저렇게 그녀를 관찰하며 노린지 석 달, 마침내 다른 아이들을 의식하지 낞고 말을 걸 기회가 왔다. 내가 노리고 노리던 그녀, 마침내 나의 사정권 안에 들어온 것이다. 미리 수업시간에 가끔씩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 만한 짓을 해서 나를 인식시켜놓긴 했다. 한참 설명을 하는데 눈길을 창밖으로 향한 채 멍하니 있는다든지,오래도록 그녀의 몸매를 훑어본다든지 하면서 그녀가 나를 인식하게끔 한 것이다. (p108)


그녀가 약간 호들갑스럽다 할 정도로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나를 덥석 안았다. 나는 엉겹결에 그녀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녀는 보기보다 키가 훨씬 더 컷다. 엉겹결에 그녀의 단단한 가슴 사이에 얼굴이 묻혔다. 그녀의 젖가슴 깊은 곳에 딸기 향내가 났다. 아까는 막연히 향긋한 냄새라고 느꼈던 바로 그냄새, 딸기 향내를 맡는 순간 이제 그녀의 냄새까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잠시 나를 내려다보는 듯하던 그녀는 내 얼굴을 두 손 감싸더니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 위에 포개었다. 나는 흠칫했다. 늘 갈망하던 일이었지만 실제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숨소리가 나에게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전해졌다. 나는 그녀 안에서 부드러운 딸기처럼 자연스레 으깨어지고 있었다. (p124)


시인 박상률의 <세상에 단 한권뿐인 시집>은 시집이 아니다. 세편의 연작 소설로 이뤄져 있으며, 청소년의 자화상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고, 청소년의 고민과 10대 청소년이 간직하고 있는 그 때의 정서들을 재현하고 있다. 공부가 주목적이라 말하는 청소년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획일화된 교육 시스템 안에서 맹목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부모의 욕구가 내 아이의 운명이 되고, 공부를 잘 하던, 잘하지 못하던 스트레스에 노출되고 만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거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공부에 쏟아버리는 아이들의 실체에 대해서 작가는 세 편의 소설에 깊이 베여 놓아버린다.공부를 잘해도 부모님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청소년에게 주어진 현실들, 그 현실들은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선택권을 막아버리고, 인생의 전부는 공부라는 인식으로 채워지게 된다. 우울이라는 감정들이 10대 청소년 사이에 만연하는 이유, 내 아이가 잘되길 바라는 부모의 욕망이 한 아이를 망쳐 놓게 된다.소설 <세상에 단 한 권 뿐인 시집>에 수록된 세편의 단편  중에서 눈에 들어왔던 것은 <너는 깊다>이다.


단편 소설 <너는 깊다>는 여고생이 바라본 이성에 대한 느낌이 세밀하게 그려지고 있다. 선생님과 제자 사이에 느껴지는 사랑에 대한 감성, 이성이 아닌 매력적인 동성을 바라보는 여고생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자신이 노리는 것은 꼭 쟁취하겠다는 그 마음이 숨어있다. 여고생으로서 공부보다 자신을 심쿵하게 만들어 버리는 영어 원어민 교사를 바라보는 그 모습은 그윽함이나 매력을 넘어서서 숨막힘 그 자체였던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수업시간에 원어민 선생님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연습장에 그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주인공의 사랑에 대한 표현법이었고, 또다른 사랑의 연결고리였다. 그리고 또 그려서라도 선생님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다. 막연히 주변 또래 학생들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가게 되는 사랑의 실체는 금기를 넘어서게 되어, 두 사람은 일탈된 가벼운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간절하게 원하였던 그 사랑의 실체, 그 사랑을 얻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또다른 감정묘사들,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은 여느 여고생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은 묘사들과 함께 채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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