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모텔 현대시세계 시인선 72
배선옥 지음 / 북인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변방 사람들

겉으론 풍요로운 정적이 아주 오래도록 흘렀다

저녂이면 창마다 환하게 켜지고 점잖아진 사람들은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게 역력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이웃에겐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고 눈꼬리를 최대한 끌어올려 한껏 길게 만든 눈으로 아는 체했다. 이 겨울만 잘 나면 30년 묵은 아파트를 훌훌 벗어버릴 수 있으려나 방금 충전을 끝낸 배터리처런 마음은 늘 기꺼워서 늦은 저녘을 먹으면서도 계산기를 두드려보느라 수저질이 더뎌졌다.

유난히 길고 지루한 한철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새 소식은 없고 규격봉투에 담지 않은 쓰레기가 파편처럼 날아 박히기 시작했다.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던 대형건설사의 재개발 축하 현수막이 슬그머니 사라진 날 편이 갈린 사람들은 똥개처럼 허옇게 거품을 물었다 서로 물고 뜯으며 잇몸을 붉혔다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한 시계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자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고 그걸 모르는 사람도 없었다.

때도 아닌 화사경보가 내린 아침 무거운 눈꺼풀을 걷어 올리고 남자들은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우아한 일상들을 다시 상자에 담았고 꼭꼭 여며 창문을 닫아걸었다. (p15)

중년

너무 오래도록 두꺼운 껍질 속에 갇혀 있었다. 싱싱한 과육이 가득 차 있을 때 무엇이든 되었어야 하는 거였어 내가 바닥만 남은 소주병을 흔들며 흘러간 유행가를 흥얼거릴 때 나약해서 아무것도 결단낼 수 없었을 거라고 비웃었었니 하지만.

마음을 정한다는 게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더란다. 언제나 용기보다는 손익계산서가 먼저 마음을 붙잡았지 망설이다가 나이 먹으니 겁도 많아져 늘 이도 저도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었더니 이렇게 세월이 두꺼워져 있더구나

더께가 앉아 제 색깔을 잃어버린 시간들을 이제라도 다시 끄집어내서 닦아야 하는 거니 지푸라기에 이쁜이 비누를 문대 빡빡 닦아놓던 내 어머니의 양은냄비처럼 인생이 말끔해지도록 바둥거린다면 환화게 웃으며 다가와 크게 불러줄 수 있겠니.(p80)


한 편의 시를 연속으로 읽어 나갔다. 시를 음미하면서 ,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고, 차가운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돈과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하염없이 돈으로 매꿔지게 되고, 채워지게 된다. 시간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그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지하게 되면서 , 우리는 그렇게 주판을 굴리고, 계산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인간이 추구하는 논리조차도 돈이 우선이 되어진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어른이 되어 갈 수록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돈의 가치를 무시하는 어른들에게 분노하고 항거하게 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이 추운 겨울에 읽기에 딱 좋은 시들이 모여져 있다. 슬픈 시는 내 감정이 슬픔으로 가득차 있을 때 읽어보는 것이 좋다. 차가운 현실을 비추는 시는 그 차가움의 덫에 벗어나지 않고, 내몰리게 되는 현실 속에 나를 밀어 넣으면 되는 거다. 메리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차가움은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된다. 30년 넘은 아파트에서 머물러 살면서 불편함을 감내해 왔던 그들은 건설사들이 걸어놓은 현수막 하나에 희비가 엇갈리게 된다. 하지만 희망을 선물해줫던 그 현수막이 철거되면서 그들은 차가운 현실앞에 고스란히 노출 되었으며, 동상이 걸릴 듯한 살갗을 서로 마주하게 된다. 그 차가움을 피부로 느끼는 그순간 서로를 잡아먹기 위한 인간 짐승이 되어서 다시 나타나게 되었고, 예의를 중시했던 그들은 눈앞에 놓여진 손익계산서 앞에서 속절 없이 무너지게 된다.


이 책은 바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자 한다. 저자의 생각과 관념속에서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보편적인 한국인들의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 현재 21세기를 피로사회라 부르면서 성과사회라 부르는 이유는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옥죄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규율사회에서 성과 사회로 변화를 거듭하게 되면서, 함깨 살아가는 것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덕지덕지 중년이 되어지는 세월들이 자신의 몸에 덧칠되면서, 순수했던 한 사람은 점점 더 다른 사람이 되어진다. 어른이 된다는 그 쓸쓸함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으며, 어른들이 어른들을 마주하는 그 과정들이 시 곳곳에 묻어나 있다. 도덕적 관념에서 벗어날려고 하는 한 짐승의 몸부림이 시 속에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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