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오면 연락해
백인경 지음 / 꿈공장 플러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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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그치고 비가 내리면
어금니를 꽥 깨물었다.
누가 나의 관자놀이를 보고 있을까 봐
힘을 주지 않아도
투명한 핏줄이 돋으니까

그런 짓은 항상 잘했다

상처 위로 굳은 껍질을
슬쩍 떼어내 확인하는 일
이것 봐, 괜찮아졌잖아
노력은 계절의 몫이었는데

네가 내 앙상한 삭정이를 만지고 지나갔을 때
없는 꽃송이가 품에서 버벅거렸다
배꼽을 간지럽혔다.(p12)


키스

두 개의 입술이 단단하게 맞물리던 순간
몇 개의 언어가 밀봉되었다

차가운 것은 아래로, 뜨거운 것은 위로 간다
체르노빌에서도 같은 추락을 본다.

늑골 속 물살이 격렬해지고
일식에서 월식으로
라니냐에서 엘니뇨로
푸른 해파리들이 치밀어 오를 때
이윽고 살갗이 건조해질 때
우리에게 같은 맛이 날 때

발목이 얼어붙는다

뜨거운 것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우리는 서로의 목을 움켜쥔다.(p13)

질의 삶

작은 동굴 속
모닥불 주위에 모여앉아
그림자 맞추기 놀이를 했다

저건 잘린 손가락
탱고를 추는 노파
아니 붉은 토끼야
우린 참 가진 것도 많다고 생각했지

자고 일어나면 동굴 밖으로부터
무서운 편지들이 날아왔다
여긴 지옥이야! 이상.
손톱으로 꾹꾹 눌러 접은

서로를 등 뒤에서 안아주다 귀를 대면
목소리가 조금, 크게 울렸다
신기하다 더 말해봐
나는 잘 모르겠는데
비를 맞진 않았다
가끔 감은 눈꺼풀 위로
석회질 섞인 물방을이 떨어졌다

나뭇잎과 단풍잎과 낙엽
창문과 노을과 무지개
나와 그녀와 엄마
사실은 모두 같은 말

언니들은 굳은 박쥐를 뚝뚝 따서
해수면을 향해 던졌다

원래는 이 곳도 바다였다고 했다.
파도가 절벽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고 했다.(p37)


내가 선택한 단어, 내가 선택한 문장,내가 선택한 시구난 내 마음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인 거였다.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은 내가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들로 이뤄져 있었으며,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나 자신이었다. 시인 백인경씨의 <서울 오면 연락해> 가 가지는 제목은 많은 걸 내포하고 있다. 자신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기도 하고, 가장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인의 또다른 마음이며, 익숙함 그 자체이다. 쓸쓸함과 우울함이 묻어나 있으며, 그 안에 필요한 것은 괜찮은 나 자신이다. 살다보면 우리는 많이 삐걱거리고, 많이 넘어지고, 때로는 많이 깨지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 나는 괜찮아, 나는 다행이야 라고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또다른 인생이었다. 우리가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의 또다른 겹핍덩어리 나 자신이 있는 건 아닌가 생각되었다. 시인의 시를 통해서 나를 들여다 보고, 나를 더 들여다 보기 위해서 시를 반복적으로 읽어간다. 일거가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 더 많이 상상하고 싶은 구절은 써내려 가게 된다. 시를 쓰는 그 순간 나는 내가 손이 있고, 손가락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돌이켜 보자면 감사함이란 언제든지 내 앞에 놓여질 수 있고, 내가 스스로 충족시켜 나갈 수 있다. 물론 나 스스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내 앞에 놓여진 감사들은 그냥 신기루가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랑을 상상하였고, 아픔을 상상하였다. 누군가를 그리워 하게 되고,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내 안의 상처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내 안의 또다른 우는 아이를 볼 때도 있었다. 책 속 표지 속에 놓여진 시어들, 그 안에는 작가 백인경씨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사랑이라는 또다른 실체가 눈에 보여졌다. 사랑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우리들은 때로는 그것을 왜곡하고, 따른 프리즘 속에 가두어 버린다.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삐뚤어진 사랑을 진실된 사랑이라 생각하는 건 아닌지, 사랑은 사랑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었고, 의미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사랑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으며, 또다른 나, 익숙하지 않은 나, 낲선 나 자신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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