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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여행을 떠났으면 해 - 그저 함께이고 싶어 떠난 여행의 기록
이지나 지음, 김현철 사진 / 북하우스 / 2018년 10월
평점 :
우리는 우리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의 영원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얼이에게 평생 불릴 이름을 선물했다.보이지 않는 것,경험과 지혜를 소유하는 데에서 더 깊은 만족을 얻고,진리와 내면을 사랑하는 것에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p82)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내 시간을 ,내 사랑을 당신에게 줄게. 앞으로의 날들을 함께하자.내가 선물한 회중시계는 둥글고 단단한 금속 안에 유리로 되어 있어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투명하게 보이고 태엽으로 움직였다. 닳거나 교체해야 하는 배터리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태엽을 감아주는 한결같은 노력이 있어야 시곗바늘이 계속 돌아간다.(p98)
감정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각자 가지고 있는 서사에 따라 각기 다른 감동의 순간을 맞이한다. 나름의 감격이 여행 곳곳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그러모아 가방에 담는다. 그림과 영상과 음악으로 짐을 꾸린다.(p151)
"나는 여보랑 함께 있으니까 배를 놓쳐도 길을 잃어도 다 재미있었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제야 호텔 마당 곳곳에 떨어져 있던 열대의 꽃향기가 났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그 순간에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 (p189)
그런데 그런 얼이의 수많은 '처음'에 대한 기록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낯설고 먼 땅에 영영 찾을 수 없게 두고 온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내가 그곳에 놔두고 온 곳이 무엇인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지난 몇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차곡차곡 담아두었던 거대하고 사소한 모든 행복의 순간들을 통째로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상실감이 얼마나 컷는지 잠도 오지 않았다. 아쉬운게 아니었다. 아프고 속이 상했다. (p227)
얼이가 더 많은 표현을 알게 되고 언어에 익숙해지면서 기억과 추억을 되새기는 일도 잦아졌다. 얼이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발을 감겨들던 모래와 바르샤바에서 맛보았던 따끈한 수프의 맛과 향, 쿠알라룸푸르 어느 골목에서 쏟아지던 웃음과 빗방을,잔지바르의 촉촉한 바다 내음과 거리에서 시끌벅적 춤을 추던 호찌민의 늦은 밤, 그리고 우리 셋이 꼭 잡고 걷던 손의 든든한 감촉과 온기도 각각의 빛을 내며 담겨 있겠지.(p252)
여행과 행복이 연결되고 있다. 저자 이지나씨.아니 김현철의 아내,김 얼의 엄마로 불리게 되는 또다른 존재적 의미를 간직한 사람. 작가 이지나는 김얼과 남편 김현철과 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의 낯섦과 익숙함 속에 놓여지게 된다. 항상 언제 어디서나 남편과 함께 하면서 , 15개월 아들 얼이라 부르는 조그마하고 사랑스러운 작은 꼬물딱지와 함께 하는 그 순간, 모든 여행의 기준은 얼의 눈과 귀와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시작하였고, 머물러 있게 된다. 여행을 통해서 내 아이의 성장을 지켜 보게 되었고, 남편과 여행을 통해 결혼하기 전 자신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한 남자의 소중함을 알알히 기록해 나가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은 특별한 일상의 연속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연속에서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서로를 비추어 나가는 또다른 여행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작가 이지나의 여행은 특별하지 않았다. 결혼 하기 전 여행 책자 없이 여행 비행기표와 여권 하나로 달랑 떠나 버린 여행, 그 여행은 이지나 만의 여행 방법이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여행이 되었다.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난 여행은 다양한 변수들이 눈앞에 놓여지게 되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결혼 후 여행은 달락지게 된다.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라, 아이와 남편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항상 계획하고 수정하는 여행일정을 만들지만, 아이의 시선에 따라서, 느낌에 다라 여행은 항상 바뀌고, 변경되었다. 그 안에서 때로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여행일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순간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내 아이의 소중한 첫 기억들, 여행을 통해서 아이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지만, 기록 속에는 그 여행의 발걸음이 남아있었다. 그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서야 자가 이지나는 깨닫게 된다. 자신의 일상적인 습관과 관습이 자신의 소중한 기록들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계속 살아왔고 머물러 왔는 거인지도 모른다. 정답인 줄 알았는데, 정답이 아닌 길로 걸어가다 보면, 스스로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절벽의 끝자리에 내 발걸음이 머물러 있는 그 순간, 우리는 아차 하게 되고, 후회하게 된다. 저자는 바로 그런 순간을 여행을 통해 느꼈으며, 소중한 내 아이, 소중한 내 남편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