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숨그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2009년 노벨 문학상을 타자 마자 한 번 읽었고, 2015년 다시 읽은 숨그네, 헤르타 뮐러는 이 소설을 통해 무명의 작가에서 유명의 작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고은과 무라카미하루키가 노벨 문학상 경쟁을 벌일 때 헤르타 뮐러도 자신이 노벨문학상을 탓다는 것에 의아해 했다. 그 당시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보면서, 노벨문학상은 전쟁문학을 좋아하며, 전쟁 뒤면에 감춰진 인간의 단면을 잘 묘사한 책들을 우선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이 소설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셍텍쥐페리의 어린왕자 만큼이나 다시 읽을 가능성이 크다.
누구나 빵 바꾸기의 덫에 걸린다. 그러나 아무도 경비원 카티의 볼빵을 자기 빵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것도 빵법정의 법에 속한다. 우리는 수용소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시체를 치우는 법을 배웠다. 사후 경직이 시작되기 전에 죽은 이들의 옷을 벗긴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그들의 옷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아껴둔 빵을 먹는다. 그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면 죽음은 우리에게는 횡재다. 그러나 경비원 카티는 살아간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 (p136)
우리가 뼈 남자와 뼈 여자가 되어 성별이 사라진 후로는 배고픈 천사와 짝찟기를 했다. 배고픈 천사는 제가 이미 훔쳐간 살마저도 희롱하며 점점 더 많은 이와 벼룩을 침대로 데려왔다. 뼈와 가죽의 시간은 매주 한 번 작업이 끝난 후 수용소 마당에 줄을 서서 이를 잡는 시간이기도 했다. 사람뿐 아니라 물건도 남김없이 밖으로 나가야 했다. 트렁크, 옷, 침대,그리고 우리. (p179)
나는 크고 작은 감자를 모자 속까지 온몸에 채워넣었다. 나는 273개까지 셌다. 배고픈 천사는 상습 절도범이었는데도 나를 도왔다. 그러나 나를 도운 후에는 역시 상습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답게 돌아오는 먼 길을 나 홀로 버려두었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곧 온몸이 근질거렸다. 머릿속의 이, 목덜미의 이, 겨드랑이의 이, 가슴의 이,음모의 이, 덧신 안에 발싸개로 감은 발가락 틈은 말할 것도 없었다. 팔을 뻗어 긁고 싶어도 소매를 감자로 꽉 채운 탓에 그럴 수 없었다. 바짓가랑이를 가득 채운 탓에 걸을 때 무릎을 굽힐 수 없었다. (p220)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전쟁의 참혹함을 알기 위해서다. 문학은 전쟁의 많은 부분을 희석시킨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희석 시킨 부분을 상상으로 채워 나간다. <숨그네 > 속의 주인공 레오는 루마리아인으로 러시아인에 의해서 수용소에 집결하게 된다. 레오는 자신에게 놓여진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였다. 부모의 테두리에서 벗어난다면 그곳이 수용소라도 레오에겐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오는 수용소에서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참혹한 수용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속에서,인간이라는 존재는 파리 목숨이었다. 루마니아인에게 처해진 현실과 러시아와의 관계, 이와 벼룩이 덕지 덕지한 삶을 살았던 레오의 지상과제는 생존이었다. 내것을 우선 챙기고 남의 것을 탐해야 하는 현실, 누군가 죽는다는 건 불행이 아니라 행운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감자를 먹어야 했고, 시체를 탐해야 했다. 그 누구도 여기서 도덕은 의미가 없다. 죽은이가 가지고 있는 빵을 내것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우리에게 인간의 존재를 동물의 존재로 가깝게 만드는 현실적인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그 어리석은 논리가 생존 앞에서는 무너지게 된다. 온몸이 가렵고 움직이기 불편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자를 사수하기위해서는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5년간의 수용소 생활은 레오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수용소의 삶에서 벗어난 레오의 삶은 과거의 현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