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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계곡
박민형 지음 / 작가와비평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동네 사람들은 나를 두고 철이 일찍 들었다고 떠들었다. 영약하다고도 했다. 영리하다고도 했다.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듯 '영악' 과 '영리' 의 뜻은 엄연히 다르다. 영악하다는 것은 잇속이 밝고 애바르다는 것이고, 영리하다는 것은 똑똑하하고 눈치가 빠르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그 단어를 뒤섞어 내게 남발했다. (P47)
소설 속 주인공 정은숙은 1958년에 태어났다. 태어나자 마자 엄마에 의해 버려졌던 은숙은 할머니에 의해 길러지게 된다. 젖동냥을 통해 성장하게 된 은숙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시대의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월남아줌마, 미제 아줌마, 곤로, 교탁, 반공일은 지금은 거의 쓰여지지 않는, 은숙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1970년대에 쓰여졌던 언어이다.
60이 넘은 은숙은 자신을 키워준 오영철의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오영철과 결혼하게 되었다. 남남이었지만, 결코 남남이 아니었던 두 사람은 연을 맺게 되었고, 오영철의 어머니는 시어머니였지만 친정어머니와 같은 분이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오채희는 은숙의 과거를 빼닮은 분신이었고, 똑똑하면서 영악하고, 영리했다. 하지만 은숙과 달리 채희는 사고뭉치였으며, 결국 예기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시작은 일일곱 딸 오채희의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은숙의 삶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고, 무능한 아버지와 브라질로 가버린 어머니로 인해 은숙은 버려지게 된다. 하지만 그 역경을 은숙 스스로 해쳐나갔으며, 주변 사람들의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존재를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여기서 은숙의 그런 삶이 가능했던 건 1970년대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다. 글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고, 은숙은 글을 알고 , 문장을 잘 쓴다는 이유만으로 주변 사람들의 심부름을 도맡아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사라과 순정 편지를 대신 써주고 그럼으로서 자신의 글 솜씨도 늘어나게 되었다. 정작 자신의 짝사랑이자 고모의 아들인 찬수 오빠에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책에는 초등학교이라 말하지만, 은숙이 살았던 그 때엔 국민학교였다. 12살 어린 나이부터 편지를 써내려갔던 은숙의 남다른 국어실력은 문장을 다듬어가면서 때로는 자신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편지도 능청스럽게 써내려가고 있다.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자면, 그게 국민학생이 보내는 편지인가 싶을 정도로 문장이 화려하고 진정성 가득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 남다른 실력이 은숙이 성인이 되어 영어번역을 도맡아 할 수 있었고,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또다른 이유였다.
억척스러웠도, 때로는 두려웠다. 그리고 은숙은 살아야 했다. 할머니도 없었고 고모가 가는 곳에 얹혀 살아야 했던 은숙의 삶을 보면 바로 우리의 부모님의 삶이 어떤지 엿볼 수 있다. 사회에서 빨갱이라 말하는게 당연하였고, 돈을 벌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할 수 밖에 없었던 그때의 모습들, 은숙은 공부를 잘하였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은숙이 짝사랑했던 찬수 오빠는 법대에 입학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였지만, 인문계고등학교가 아닌 공고를 선택하고 말았다. 그들은 그 시대의 아웃사이더였고 자신의 원하는 길과 꿈을 선택하게 된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살아가지 않고, 은숙은 억척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때로는 자신을 길러준 시어머니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고, 고마움도 있었다. 자신의 인생은 딸에게 되물림 되었으며, 나와 똑같은 삶을 살아갈까 은숙은 두려워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