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치맨 Watchmen 1 시공그래픽노블
Alan Moore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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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치맨(Watchmen)’에는 예의 여러 슈퍼히어로가 등장한다. 저마다의 독특한 코스튬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나 그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거나 땅에서 솟은 초능력의 소유자도 아니며 특히나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탄생한 의기양양한 정의의 사도로서 처음과 끝이 일관된 정신과 육체의 소유자도 더더욱 아니다.
물론 여느 슈퍼 히어로처럼 그들에게는 불합리한 사회에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활발한 활동의 의지를 갖고 출발한 듯하다. 그러나 명분이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본질의 왜소함에 점점 존재에 대한 고민을 떠안고 사라져간다.

그러던 어느 시기부터 은퇴를 했던가 아니면 후미진 곳에 조용히 거주하던 그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표적이 되어 사라진다. 과연 누가 그런 일을 했을까?

우선 광고 표지에 나타난 그래픽 노블이라는 색다른 장르의 명칭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난 이전 ‘씬시티’에서 이미 이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에 대해 접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바로 정의를 내 스스로 내릴 수는 없지만 감으로 대충 알 듯 모를 듯 장님 코끼리다리 더듬듯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난 그냥 코믹, 만화 뭐 그렇게 간단히 부르려 한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는, 아니 왜 달라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 만큼 표현에 있어서 성인 취향의 과감한 내용이어서일까? 아니면 좀 더 선긋기를 통한 경계가 기존의 만화라는 장르에 머무르기에는 그 만큼 만화가 갖고 있는 한계로 인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일까? 다시 말해서 그들(미국)에게도 만화라는 장르는 아이들과 연관된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하여튼 모르겠다. 내가 미국 만화 시장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으니까, 답을 바로 구하기도 역시 어렵다. 그래서 그래픽 노블이란 명칭에 대해 잠시 접어두고자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코믹의 다른 이름이 필요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코믹의 자리매김이 허술한 것에는 나름 불만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코믹은 코믹일 뿐이지만 또한 코믹은 코믹으로서 좋은 표현 방법이기에 나는 코믹 그 자체를 좋아한다. 아직도 코믹은 아동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요즘은 성인들도 지속적으로 코믹을 접하는 성향도 이어지고 있지만 어쨌든 코믹 또는 만화가 ‘유치함’이나 ‘저급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시절이 그만 지나가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왓치맨’은 그만한 가치를 담고 있어 기존의 고정관념을 일소하고 불식시키는데 한 몫 하리라 기대된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고 있는 동안 불쑥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이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슈퍼맨에서 하다못해 아쿠아맨까지 등장하는 ‘지구영웅전설’이 노골적인 슈퍼 히어로물의 풍자적 전초전이라고 본다면 왓치맨은 보다 깊숙이,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바지위에 팬티를 입은 기상천외한 코스튬을 한 영웅들의 극히 인간(?)적인 모습에 접근하는 시선이 사뭇 냉철하고 냉소적이다.
그래서 왕성한 열정의 영웅이기보다 왜소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 전달된다.
특히나 1권의 대미를 장식하는 로어세크의 경우는 조금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사회 저변의 어두운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갈겨대듯 그려나간다. 그 속에서 어둠을 먹고 탄생한 로어세크의 출현은 과연 사회가 표방하는 영웅의 본질이 뭔지 되묻게 한다. 그들에게는 정신적 상처로 얼룩진 트라우마가 무의식적 원동력이 되어 세상을 밝음으로 이끄는 명분과 의미나 가치의 미명하에 사실은 반대적인 현실의 발현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사회 정의는 말 그대로 정의 그 자체가 아슬아슬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왓치맨은 영웅 뒤에 가려진 인간의 모습에 대한 탐색전으로서 많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해석하는데 누구든 여념없이 깊은 바다로의 침잠을 경험할 것이다.
그래픽 노블, 왓치맨!
진정한 ‘얘기’와 ‘그림’과 ‘상상’을 만나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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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의
랜디 포시.제프리 재슬로 지음, 심은우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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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는 과제를 내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게 이끈다. 그리고 계속 그 과정을 반복하라. (p61)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산다고 했을 때 가령 나라면이란 가정을 염두에 두고 상상력을 펼치는 일이 간혹 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맞닥뜨려 겪는 일과 상상은 결국 태양계와 안드로메다 만큼이나 먼 거리라고 할까? 상상력이 갖는 한계로서는 잔인하게도 현실성에 비추었을 때 근접하기에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조금은 자신 있게 단언하겠다.

 

그래서 나는 애초부터 섣불리 그런 인생에 이렇다 저렇다 말을 보탤 의사가 전혀 없음을 미리 유념하며 ‘마지막 강의’를 탐독했다. 꼭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감히 죽음에 대한 고통을 얘기하겠는가? 남겨진 자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얘기하겠는가?

이 모든 걸 담아도 남아도는 무언가를 무엇으로 채울지 나는 그냥 저자 랜디 포시 교수에게 맡겨야 할 듯했다.

카네기 멜론 대학의 컴퓨터과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 자녀의 아버지로서, 이상형인 여자이며 아내의 남편으로 너무도 단란해서 사진을 봐도 한 눈에 행복이 뚝뚝 묻어나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암이라는 선고가 내려진 후 열심히 수술과 치료를 받아 종양이 사라졌나 싶었는데 석달 내지 육개월 밖에 살 수 없다는 얘기를 주치의로부터 전해 듣는다.

그리고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유한한 시간을 좀 더 가족과 함께 보내며 추억의 선물을 간직하고 싶어 한다.

 

그 와중에 대학에서 마지막 강의를 준비하게 되고 그것은 곧 여섯 살, 세 살 난 두 아들과 십팔 개월된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영상으로 담는다. 그리고 그것이 인터넷을 통해 큰 반향을 일으킨다.

 

너무 어려서 아버지를 제대로 기억 못할 아이들을 생각하며 남겨주고 싶은 얘기들. 기억되길 바라는 모습들. 그리고 지난 삶을 돌아보며 정리의 시간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아마도 책 속에서 제일 많이 눈에 띄는 단어는 “꿈”이었던 거 같다.

어릴 때 꾸던 꿈과 그걸 이루려 노력했던 지난 날. 그건 차라리 모험에 가까웠다. 그리고 대개를 이룬 행운아이지만 사실은 노력가였던 사실 등을 고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나는 평범한 듯하면서도 절실한 그의 음성의 울림을 되새김질 하면서 포기해선 안될 나의 꿈을 스스로 정리해 봤다. 그리고 나도 그 길 위에 서서 노력하다 마치는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것이 꼭 멀리 있을지 가까이 있을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성 싶다. 나는 순간 떠나는 랜디가 되는 동시에 남겨진 아내 재이가 되다가 갑자기 아이들이 되어 미래를 꿈꾸었다. 이런 동시성은 역시 방관자의 여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가진 죽음 앞에서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인생이란 삶에 대한 여유를 어찌 따라 가겠는가? 긍정적이고 유머를 간직한 그의 따뜻하고 용기 있는 지혜로운 시선.

내가 간직하고 배우고 싶은 장점들이다. 삶의 순간순간을 즐길 줄 아는 그의 시선들은 유한성을 뛰어넘어 풍부하게 채워지는 시간으로 충족된다. 그래서 삶의 질이 양을 앞질러 큰 위안이 되는 것 같다. 몇 장의 가족사진들과 곁들여 랜디 포시의 독백과 같은 얘기들을 읽으면서 나도 좀 더 내게 충실하고 진실 되게 노력하자고, 그렇게 랜디 포시 교수를 닮고자 인생 선배이자 역할 모델로서 그에게 기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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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사 오디세이
쓰지 유미 지음, 이희재 옮김 / 끌레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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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마도 영어공용화니 몰입교육이니 하며 한창 시끄러울 때였던 거 같다.

우리처럼 영어를 잘 못하는 일본의 경우 외국 신간들을 재빨리 번역을 해서 출판하기 때문에 외국의 출판물을 받아들이는데 시기적으로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온 국민이 영어를 못하면 학문이나 저작물에 대해 흡수가 늦고 따라서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온 국민을 영어로 무장시키려 무리하게 애쓰기 전에 제대로 된 능력 있는 번역가들을 발굴하고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는 말이 뒤에 이어졌던 거 같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니 책의 위기니 이런 저런 위기론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항상 위기의 상황을 강조해 왔지만 어쨌든 출판물의 출간은 최소한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걸 감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면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님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바로 피부에 와 닿는 문제로서 ‘번역’이란 부분은 꽤 심각하다는 걸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제대로 된 번역물을 만날 때 읽는 맛이 얼마나 풍성한지 역시 경험해 본 사람은 잘 안다.

그건 조금 과장을 하면 감탄을 뛰어넘어 감격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 바로 그 ‘번역’의 문제를 ‘번역사’라는 범위로 넓혀 에둘러 짚어보는 책이 있다.

번역사 오디세이.

저자 역시 번역가로서 번역의 문제를 깊이 있게 고민하다 번역사를 더듬어 보는 방법을 택했으리라 짐작된다.

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자료를 구하고 내용을 풀어나가지만 세계적인 번역의 흐름과 가치의 맥을 찬찬히 짚어 나가고 있다.

 

힘을 발휘하던 국가는 사라졌지만 언어는 학문어나 문화어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위세를 떨쳤던 사실은 여러 증거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나 통속어로서 위력적인 가치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부단히 이어가고 갈고 닦아 나가야 할지도 어렴풋이 짐작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바로 그런 방향으로 나가는 과정에는 번역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우선적으로 선택된다는 모순 같은 사실을 알고 나니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난 번역이란 하나의 책을 만나는 과정에서 건너는 다리정도로 단순화시켜 생각했다.

그런데 더 나아가 번역이란 외국의 학문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수단으로써 확대해석 된다는 사실을 작가의 목소리에 실어서 그 무게감을 안게 되었다.

 

사실은 외국문화의 흡수에 대하여 이 책을 통해 나의 인식은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무지했고 그래서 융통성이 결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와 국가를 가로질러 번역가의 노고와 잉태된 번역물이 쌓여 발전을 담보한다는, 그것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지식을 축척하는 방법에서 기인하는 존재적 가치의 증거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을 덮고 가만히 책의 표지를 바라본다.

저자의 여정이 안겨준 지식의 보고 앞에 나는 작은 울림이 파장을 일으켜 ‘번역’에 대한 인식의 장을 넓히는 경험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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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실수 1
프랭크 탤리스 지음, 김시현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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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몰아치던 밤 미모의 영매가 살해되어 시체로 발견된다. 그것도 밀실살인으로.....
라인하르트 경위는 사건해결을 위해, 종종 신세를 지던 정신과 의사 막스 리버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당시 의혹과 질시,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의지해서 닥터 리버만은 사건을 추리 접근해나가는데......

마침 바로 얼마 전에 공교롭게도 <살인의 해석>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이 작품과 공통점이라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의지해서 사건을 분석하는 정신과 의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신세계 미국에 첫발을 내딛는 프로이트에 대한 표현도 흥미로웠지만 대서양 건너 유럽이라는 무대에서의 프로이트를 모티프로 한 또 다른 작품을 만나는 것이 우연치고는 꽤 흥미롭다.
결국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프로이트가 끼친 영향이며 그와 그의 학설에 대한 논의가 여러모로 다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왜 하필 프로이트란 이름은 살인에 대한 추리소설에까지 등장하는 것일까?

어쩌면 과학이라고 칭하기에는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무의식이라는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정신분석이 갖고 있는 인문적 매력이 탐정을 매개로 해서 사건과 만나 더욱 그럴듯한 인식의 세계로 초대하는 순간을 독자에게 맛보게 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성과 합리주의가 꽃핀 근대의 유럽 한복판에서 살인을 당한 피해자는 마침 혼을 불러들이는 영매이다. 거기다 용의선상에 오른 강령회에 모인 사람들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결국 인간이란 근대의 산물에서만 정의 내려질 수 없다는 현실을 알려주는 듯하다.

백 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라가 유럽의 빈을 여행하는 즐거움도 솔솔하다. 그 때 그 곳에는 참 유명한 인물들이 회자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프로이트, 클림트, 말러 등등.
그리고 당대의 사회상이 잘 그려져 이해를 돕고 있어 그들의 생활상이 손에 잡힐 듯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여성 투표권과 고등교육에 대한 개방성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켜며 가치가 강조되어 발현되기 시작할 무렵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여성의 권리적 표현을 정신적인 문제로 매도하는 사회상이라든지, 실제 정신병에 있어서는 전기치료를 빙자한 비인간적 접근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참으로 가슴 아픈 상황이다.
그로부터 지금에 당도한 사실을 인식하면서 어떤 사회적 피해가 바닥에 깔려 높이 봉우리를 이루며 발전을 거듭해 왔다는 사실이 그나마 무거운 위안으로 다가온다.

소설은 몇 페이지 안 되는 단락들이 화면이 흐르듯 짧은 호흡으로 연결되어 읽기에도 편하고 스피드하게 책장을 넘기게 한다. 지루할 틈도 없이 재빠른 화면 전개가 다음으로 줄달음치도록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어느새 마지막에 당도한 후에야 사건 해결과 범인을 목도하게 된다.

문화사를 밑바탕으로 한 고급스런 추리 소설 한 편을 읽으며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었다. 특별한 지적 유희가 아니어도 시원한 여행의 끝자락에서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채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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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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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익명의 측량사 K가 성 아랫마을 여관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은 경계와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으며 외지인 K를 주시한다. 법과 질서를 혹여 무시하거나 해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을 떠안고 그리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강하게 배척한다.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성을 찾아가 측량사로서 자기 역할을 정확히 획득한 후에야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을 향해 발길을 돌리지만 눈앞의 성은, 그 위에 길은 역시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길은 있되 통하지 않고 주위를 맴도는 방황과 절망이 익명의 K를 통해 미로처럼 펼쳐 있다.

책은 400페이지가 훨씬 넘고 글자는 빼곡하게 들어차 있으며 무미건조한 문체로 상황을 이야기할 뿐 전체적으로 이해를 돕고자 하는 친절함은 기대할 수 없다.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은 갑작스런 끝맺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데 이 소설이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이자 미완성 작이기 때문이다.
사실 책을 어디에서 끊든, 내용상 흐름에는 크게 지장을 주지도 않을 성 싶다.

다 읽고 난 소감?
한마디로 ‘어쨌든 어려워~!!!’다.
한 번의 만남으로 자신을 전부 내보이지 않는 작품. 그래서 몇 번을 읽어야만 할 것 같은 각오와 기대를 갖게 하는 작품.
이것이 우선으로 드는 생각이고, 더 나가 카프카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고 좀 더 친숙해져야겠다는 노력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것이 작품 [성]을 통해 갖게 된 프란츠 카프카와의 구체적인 첫 만남이다.
카프카가 내게 큰 무게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접하면서부터다.
체코 문학으로서 큰 맥을 차지하고 거대하게 버티고 있다는 느낌을 쿤데라의 지적으로 은연 중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어디 체코의 문학에서 뿐이랴. 유럽 문학 더 나가 세계 문학으로 서 그의 삶과 함께 많이 회자되는 강력한 위력은 사실 작품 해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상식의 폭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너무나 유명하고 거대해서 그늘도 깊고 넒은 것이리라.
“목표는 있지만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일 뿐이다.”
카프카의 잠언에 나온다는 이 말은 [성]의 전부를 이야기하고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신화로서 자리하게 하는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주인공 K만은 익명으로 나오는 것일까?
의아해하며 읽으면서 나는 점점 그 익명의 마술에 걸려들고 있었다.
내가 K가 되어 방황하고 주변의 여인들에게 손을 내밀고 사랑도 하고 그들에게 배척당하며 길을 나서지만 문제는 타협의 여지를 쉽지 노출시키지 않는다.
권력과 욕망의 성은 굳건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나그네 K에게 인색하게 굴 뿐이다.
성을 대표하는 관리들의 모호하고 모순된 부조리와 힘은 결국 일상에서 우리가 굳게 믿고 은연중에 의지하는 신화와 현상을 상징하면서 나의 위치를 되묻게 한다.
어떤 권력에게서 배척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의 왜소함을 부채질하면서 사회 속에 어울려 살아가는 무리 속의 나는 주문을 풀어낼 능력이 없다.
그것은 끊임없는 이야기 네버엔딩 스토리처럼 우리를 레일 위에 또다시 끊임없이 달리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성> 속의 무력한 K가 나의 거울이 되어 눈 덮인 거리를 간신히 헤집고 앞으로 나아간다.
도달할 수 없는 ‘성’을 향해.
시작은 이쯤으로 하자.
다음은 마음을 열고 다잡아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다시 성을 향하는 K의 발걸음을 주시하며 그 너머 프란츠 카프카의 색다른 이야기에 몰두해야겠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시작한 만남이 비록 부족할지라도 소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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