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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눈 서양의 눈
박우찬.박종용 지음 / 재원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최근에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얼마 전 큰 아이가 ‘피카소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시작되었다. 아이에게 피카소를 알려주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함께 볼 만한 책 세 권을 골랐다.
첫 번째 책 『피가소와 무티스가 만났을 때/니나 레이든/마루벌』는 그림책으로 피카소를 돼지 피가소로, 마티스를 황소 무티스로 묘사해 입체파와 야수파 화풍의 차이를 재미있는 이야기에 녹여냈다.
두 번째 책 『동굴벽화에서 피카소까지 이야기 세계미술사/헨리 세어어/주니어 김영사』을 통해서는 동서양의 다양한 미술의 매력을 역사적 시간에 따라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책 『피카소, 게르니카를 그리다/알랭 세르/톡』는 개인적으로 인상깊은 책이었는데, 피카소가 어떻게 게르니카를 그리게 되었는지와 그리는 과정을 담고 있어, 유명한 화가라 해도 작품이라는 것이 어떤 찰나의 영감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나 대상에 대한 고민과 작가 자신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부담 없는 그림책에서부터 다소 깊은 설명이 있는 책까지 아이와 함께 읽으면서
나도 잘 몰랐던 미술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던 중 만난, 책이 『동양의 눈 서양의 눈』이다.
동양과 서양의 미술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만들어냈다는 책 소개글을 읽으며
동양과 서양의 관점차이를 미술사와 관련하여 알고 싶어졌다.
요즘 우리가 미술관에 가서 미술을 감상한다고 하면, 서양미술전시회를 떠올리는 경우가 더 많다. 이와 같은 현상을 작가는 한국화/동양화가 수난시대라고 표현했다. 대학의 동양학과/한국화과가 없어져가고, 동양의 명화들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회에는 사람들이 찾아오질 않는다고...
'왜 동양의 미술문화가 평가절하 된 것일까?'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가 서양문화와 합리적 사고에 익숙해져 동양화/한국화를 어떻게 봐야 할지 그 안목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 힘의 권력과 상통한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기에 급급했고, 자체적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낮춰 보고 점차 그 혼을 잃었다. 그 혼을 잃은 채로 시간은 흘러 이제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
더 이상 동서양을 구분시켜 주는 뚜렷한 개성을 찾기가 힘들다. 저자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양화과를 졸업한 저자 자신이 과거 신입생 시절 ‘우리는 왜 서양과 같이 다양한 미술을 만들지 못했는지가’를 불만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동양이 인상파나 야수파, 입체파, 미래파, 추상미술 같이 다양한 미술을 만들지 못했던 이유가 우리화가들의 능력이 서양 화가들에 못 미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책에서는 서양의 유명한 화가들을 종합적 인재들로 소개한다. 예를 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제로,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미술가,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갖춘 천재들이다.
그에 반해 동양화/한국화의 작가들은 어떻게 소개되어 지는가? 정선,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같이 조선시대 유명한 화원을 포함한 화가들 외에는 그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소개가 많지 않다. 동양에서는 학식 높은 사대부들도 그림을 그렸다고 하나 ‘사대부’ 그 이름만 들어도 따분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사대부가 별거인가? 결코 아니다.
사대부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시서화(詩書畵)는 물론이고 학문, 행정, 정치에 조예가 깊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동양화/한국화를 따분하고 어렵게 느끼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양반 사대부들은 민화, 풍속화 등으로 대표되는 서민문화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격렬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림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을 담았다. 예를 들어,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일컫는데, 각 식물이 지닌 특유의 장점을 군자, 즉 덕과 학식을 갖춘 사람의 인품에 비유하여 그림에 담아낸다. 사군자에서 보듯 사대부의 문인화는 그림을 그리는 기능만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예술이었다. 이런 그림을 그리려면 사대부들의 말대로 높은 수준의 학식과 수양이 필요한 것이다. 감상자 역시 그 수준에 이르러야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나 역시 박물관에 전시된 사군자와 같은 그림은 작품해설이 구구절절 어렵게 느껴져서 그냥 지나친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내용은 이렇다.
세상의 눈은 현실을 재현하는 기법으로 하나였다. 그러나 서양에서 원근법이 개발되면서 서양의 눈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동양의 눈은 감정을 이입한다. 서양은 원근법에서 점차 나아가 더 정확하게 세상을 측량하는 여러 도구들(그리드, 실측지도, 삼각측량, 렌즈 등)이 꾸준히 개발 되었다. 반면에 동양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관찰하고 기억하여 내면화 시켜 화폭에 옮기는 방법을 쓴다. 사진의 발명으로 더 이상 현실을 재현시키는 것이 더 이상의 의미가 없어지자, 서양은 대상을 분석하여 추상화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반면에 동양은 여전히 대상과 주체를 하나로 여기고 관념으로 접근하였다. 서양이 다양한 미술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을 객체로 바라보면서 분석했던 반면, 동양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에 대해 느낀 정감을 주관적으로 표현하였다.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은 것인가를 평가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다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더 우위에 두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에게 서양의 미술에 더 익숙하게 되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이는 결코 동양과 한국의 미술이 서양의 그것보다 뒤지지 않았고, 다만 미술을 보는 안목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다소 해결할 수 없는 찝찝한 결론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이 없다면 이 세상의 경쟁에서 뒤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부터는 더욱더 세상을 새롭게 보는 자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눈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이러한 주장은 나에게 ‘변화가 반드시 좋은가??’란 의문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보는 눈. 그 관점에 따라 세상이 읽혀지고, 그로 인해 빚어진 문화가 읽혀진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고, 나는 그것을 미술사를 통해 다시 배웠다.
그런데..... 변화 없이 “여전한” 것은... 퇴보의 길일까??
출판사로 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