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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에게. 


여기 당신에게 이탈리아 미래주의 운동들에 대해 제게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도 있습니다. 
전쟁 이래로, 이탈리아에서는 미래주의 운동들은 독특한 면모들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마리네티는 미래주의 운동들을 위해 거의 무엇도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는 그저 결혼했고,
그뒤로도, 자신에 모든 정력들을 그에 아내에게만 쏟아붓길 즐기고만 있습니다. 현 국면에서도 운동 참가자들 가운데에서는 왕정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공화주의자들, 그리고 파시스트들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일프린치페, 원칙>이라고 불리는 정치주간지로부터 최근 밀라노에서도 창간됐습니다. 이 잡지에서는 마리카벨리는 16세기에 이탈리아를 위해서 제창했던 거와는 똑같이도 해결책으로, 곧 국가를 혼돈상태로만 몰아넣는 지역적인 정당들 사이에서도 투쟁으로는 자신들을 교전하는 모든 당들에 영수로 세우는 절대군주들, 새로운 체자레 보르지아로부터도 일소되어야 한다는 해결책들로부터 설명했었고, 혹은 설명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습니다. 편집인들은 두 미래주의자, 브루노코라와 엔리코 세티멜리입니다. 그리고 1920년 애국주의적인 시위과정들에서도, 국왕에 반대하는 과격한 연설들을 한 혐의로 체포됐던, 마리네티는 현재로는 이 잡지에 기고하고는 있습니다. 

전쟁 이전에 미래주의에 가장 중요한 주창자들은, 가톨릭으로 전향해서 <그리스도이야기>란 걸 쓴, 지우세페 파피니를 제외하고는, 현재 파시스트들도 있습니다. 전쟁 동안에 미래주의자들도 '갈 데까지 가는 전쟁'이나 제국주의라는 오래되고, 가장 굳센 지지자들이었습니다. 단지 한 명에 미래주의자, 알도 팔라체시만 전쟁에는 반대했습니다. 그는 운동과도 절연했었고, 매우 흥미로운 작가들 가운데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글쓰기를 완전하게 포기했습니다. 

늘 전쟁에 대한 시구들을 노래하던 마리네티는 전쟁만이 세계로부터 자신들에 체제를 대청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출판했습니다. 그는 장갑차 대대에 대위로, 전쟁들에도 참가했고, <강철침실>이라고 불리는 그에 최신작으로는 전쟁 가운데 장갑차에 대한 열정적인 찬가입니다. 마리네티는 <공산주의 바깥에서>라는 소책자를 썼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에게 정치적인 독트린으로도, 만일 이 언제나 재치있고 항상 진기한 사내들에 공상들로부터도, 독트린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생각들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탈리아를 떠날 때 '프롤레트쿨트'라는 토리노 지부로는 마리네티에게 조직에 성원인 노동자들로부터도 회화와 전시회에서 이런 종류들에 대한 예술에 중요성들에 대해서도 연설해다락고 부탁했었습니다. 마리네티는 매우 기쁘게 초대에도 응했습니다. 그는 노동자들로부터도, 나란하게 전시회를 방문했고, 노동자들로부터도, 미래주의에 대해 지배계급들보다도, 훨씬 더 풍부한 감성들을 지니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일종에 만족감만을 표시했습니다. 전쟁 전에 미래주의자들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매우 인기는 있었습니다. 한번 발행될 때마다 이천 부씩 찍어냈던 잡지들 <라체르바>는 4/5정도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통됐습니다. 이탈리아 대도시 극장들에서도 미래주의자들에 예술공연들에서도, 미래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상층계급들이나, 지배계급 젊은이들에 반대해서는 노동자들에 미래주의를 옹호하리라는 건 자주 사실로도 입증됐습니다. 

마리네티에 미래주의 모임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마리네티에 옛 잡지 <포에지아, 시>는 현재에도 아무런 지적, 조직적 재능들도 갖추지 못한 마리오 데시 같은 사람들로부터 편집되고 있습니다. 남부, 특히 시칠리아에는 마리네티는 기고하곤 하는 많은 미래주의 소식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소책자들로는 미래주의를 이탈리아어 문법들에 대한 무지와도 혼동하는 학생들로부터 발행되고 있습니다. 미래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강인한 집단으로는 화가들입니다. 로마에는 안토니오 줄리오 브라갈리아같은 실패한 사진작가들, 영화나 화가를 위한 대행업자 등으로부터도 조직되어 온 미래주의 회화라는 지속적인 전시회도 있습니다. 미래주의 화가들 가운데에서는 지아코모 빌라도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눈치오는 미래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무슨 입장들을 취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미래주의는 처음 출현했을 때, 그건 명시적으로 반다눈치오주의적인 성격들을 취했다는 걸 언급되어야만 할 겁니다. 마리네티에 첫 번째 책들 가운데 ㅅ하나로는 <신은 떠났고, 다눈치오는 남았네.>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비록 전쟁동안에도, 마리네티와 다눈치오에 정치강령들도 많은 점에서도 서로 일치했지만, 미래주의자들은 아직도 반다눈치오주의자들로 남았습니다. 그들은 피우메회복운동들에도 거의 아무런 주의마저도 기울이지조차도 않습니다. 비록 그들 역시나 이후에도 시위에는 참여했지만 말입니다. 

1차대전 강화 이후로도 미래주의자들은 그들에 특성들을 모두 상실했고, 전쟁에 결과들로부터도, 등장했던 다양한 경향들로부터는 분쇄됐다고만 부를 수 있습니다. 젊은 지식인들은 전반적으로도 극히나 반동적입니다. 미래주의에서도 옛 이탈리아문화라는 현학적이고, 메말랐고, 민중들로부터도, 소외되고, 반대하는 투쟁들에 요소들만을 보았던 노동자들도 현재 자유를 위한 무장투쟁들로부터 와중에 있었고, 예전에 논쟁들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주요한 산업도시들에서는, 노동자들에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창조력들을 깨우려고 의도된 프롤레트쿨트 강령들로부터도, 여전하게 이런 종류에 일들을 걱정할 시간이나 취향들을 지닌 이들에 힘들마저도 흡수하고만 말았습니다. 

모스크바에서, 1922년 9월 8일.




1918년 5월 21일, 코카인.


모골클럽은 다시 문을 열고 손님들을 받도록 허가를 받았던가. 필자는 이를 확인할 기회조차도 없었고, 그러고 싶은 호기심도 절대로 없었다. 그러나 암묵적인 양보도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이는 필자에겐 놀라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모골클럽에서는 경찰서장들에 명령들에 따라서만 폐쇄됐다. 젊은이들은 코카인들에 취하고자 일과 후에는 그곳에만 사람들도 모이곤 했던거다. 그렇다면 모골클럽은 왜 폐쇄됐는가. 이 클럽에서는 영업허가시간들 외에도 그저 손님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인가, 아니면 손님드도 거기서 코카인에 취하곤했었기 때문이던가. 경찰들로는 이들을 가난하고 불쌍한 치들로, 이름도, 이들에게는 독극물을 팔곤한 약사들에 이름마저도 공개하지조차도 않았었다. 이들에 이름들로부터는 사회에 안녕들을 위협하는 자들로만 공개적으로 거명될만큼 중요한 범죄자, 이상들, 이하도, 아니었다는 걸 뜻한다.

제대로된 신문들은 일말에 도덕주의를 보여주기만했었다. 이들 가운데 하나로는 이탈리아에서는 코카인 중독은 곧 불법은 아님을 깨달았고, 사실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또 다른 신문으로는 문제 무뢰한들에게도, 조국으로부터도, 그저 전시상태이고, 이들에 형제들은 참호에서도 고통받고 있음을 상기하고자하면서, 즉흥적이기만 한 설교를 요래해냈었고, 그 밖에도 유사한 도덕적인 선동들로는 이들로부터도 표현하는 허풍이나, 어리석음들로 인해서, 납동전만큼이나, 둔중하게나 울어댔다. 토리노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와 볼로냐에서도, 마약 상습자들도 발견됐었다. 

그리고 전국곳곳에서도 똑같은 격식차린, 문구들도 나타났다. '쯧쯧. 당신들로는, 악덕들에 대항하는 법들을 만들어서도 이를 제거할 순는 없다.' 분명하게도, 악덕으로는 현대문명에도 필수적인 부산물들이다. 그리고 이건 문명들을 자신들에 토대로 삼고 있다면 사실로나, 이는 다른 종류들ㄹ에 문명들을 제외한 순전하게는, 피상적인, 문명들에 경우들로만 그러하다. 이런 종류들로된, 썩은 쓰레기들, 곧 아무런 목적들도, 도덕들도, 역사들도 없는 민중들로부터 생산된 건,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다. 대다수 민중들에게도 삶으로부터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순전한 동물성, 감각적인 즐거움들, 신경이나 근육들에 기계적인 움직임들. 그러니 다들 왜 코카인에는 취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필자로는 파괴적인 즐거움들에 비탈길에서도 실족하는 사람들도 겨우 그만큼밖에는 되지 안는다는 건 오히려 놀랍다. 악덕들로부터도 더 이상으로도 확산되지도 않는 이유로는, 도덕적 의무감 때문만이 아니라, 무관심들, 전적으로도, 동물적이기만 한 무관심들 때문이다. 코카인상습자들로는, 단지 더 참지도 못해서 그럴 뿐이고, 이 현상으로는 단지 오백명도 아닌 오십만에 모르핀중독자들도 존재한다는 건 문제라는거도, 같은 차원들에서만 심각한 문제들일 뿐이다. 

또한, 심층적인 이유로는 도덕적인 목적에 대한 결여임도 분명해진다. 그러나 지배계급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도덕적인 목적들도 지닐 수나 있겠는가. 아마 그는 영웅이라면 모르겠지만, 평균적인 지배계급들에게는 결코 영웅적이지도 않는다. 일, 활동들로부터도 지배계급들에 구성원들을 직접 데카당스로부터도 구해내주지만, 이러한 계급들에 상당한 수로부터도, 개인들은 일들을 전혀 하지조차도 못하기 때문이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하루 8시간들을 그에 책상 앞에서만 보내는 백만장자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저 경마장이나, 해안가, 휴양지, 도박장몬테카를로, 루치아노 주콜리에 소설들이나, 그리고 고카인들을 더욱 선호할 뿐이다. 이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건, 감각적이고, 탐욕적이기만 한, 단조로움들, 다른 말로 해보자면, 인간들에 동물성마저도 평균수준들 이하로만 떨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목적들을 구축한다는 건, 학교 벤치에서나, 이들로부터는 온화한 심성들을 주입하게한다는 건 도대체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이던가. 그러나 학교는 사회에서는 한 연속들일 뿐이고, 사회 속에서도 삶에서는 선한영감들이라는 지아네토나, 피노키오에게나, 이야기해주곤 하던, 소박하고, 도덕적인, 이야기들 속에서는, 삶으로부터도, 다른 무엇들일 뿐이다. 일들로부터는 도덕적인 충동들을 부여하는 유일한 길들일 뿐이고. 이는, 곧 우리들에 삶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가라는 정신적 본질들로부터도, 녹아드는 도가니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에 도덕적인 충동들은 즉자적이기만 하다. 왜햐나면 이들 가운데로는 무엇보다도 일반적으로도 다른 무언가로 전화된다는 건 오직 이로부터만 서로 연결됐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조국·가족·인류·선·정의들, 이딴걸로 실현되려면, 이들은 고된 일들이나, 희생들을, 요구하면서도, 만족이나, 기쁨들을 주는 일상들에 과정들, 지루한 활동들 속에서 거듭해서 되풀이해서 실천될 필요만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들은 잉크로만 채워져야할 종이들로, 어깨에 들어올려져야만 할 짐들로, 작동하게해야 할 도구나 기계로만 바뀌어야만 한다. 실은 도덕성이란 단지 매우 사소한 행동들을, 매우 위대한 목적들에 연결짓는데만 있어왔고, 이로부터 이러한 작고 하찮은 행동들부터 실천하는 건, 이러한 행동들로부터도, 끝없는 말잔치를 매일 이야기하는 건 절실하게도 필요해진다. 그렇지도 않는다면, 코카인들에 취해지거나, 공허한 말들을 그저 취하는 거 외에는, 곧 육체적인 환각들이나, 머리 한 쪽만을 콕콕 쪼는 말벌들 같은 말들, 조국·인류·민중·정의들 같은 말들에 정신적 환각들 외에는 아무런, 무엇도 존재하지는 않을거다. 

대부분에 민중들로는 그걸 교회로 자칭하든, 당으로 자치하든, 일정한 조직들 바깥에 존재하지도 않고, 도덕성으로는 그걸 실현되는 장인들에 특수하고, 자생적인, 무슨 기관들 없이도, 존재하지도 못한다. 지배계급들로는 생산이나 관련된 영역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관련된 영역들에서도, 혼돈에 국면만을 이룬다. 이들에게는 교회, 곧 권위적인 도덕생활들에 대한 조직들을 파괴했찌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들은 청교도주의와 정치클럽모임들에 대한 열풍들을 거치지도 못했고. 그저 자유주의적인 양식이란 결사체들로는 댄스클럽모임들이나, 만돌린동호회모임들, 이상으로만 낳지도 못했고, 이제 우리는 마약중독친우들에 작은모임들로부터도, 개시하고 있다는거다. 지배계급들에 대한 결사체들로는 이들로부터는 의무도 아니고, 목적으로만 기쁨들을 누릴 뿐이다. 이들에 목적으로는 일하고 난 뒤로도 육체를 일정한 지적활동들이나, 균형들로부터도, 회복하는 무슨 방식들로 발견하려한다기 보다는, 일들로부터도, 피로해지지도 않는 신경마저도 흥분하게만 하기 때문이다. 

코카인복용들로는, 지배계급적인 진보들이나, 곧 자본주의는 진보하고만 있다는 건 한 지표일 뿐이다. 이는 전적으로도, 무책임하고, 미래들에 대한 아무런 걱정들도, 무슨 곤란이나, 가책들도, 지나지 않는 범주들에, 사람들로만, 만들어낼 뿐이다. 이러한 개인들은 해로운가. 아니다. 사회는 안에서조차도, 하나로는 모두이고, 모두는 그저 하나이기 때문에, 지배계급들만에 것, 곧 전유물이나, 소유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해롭지조차도 않는다. 이들에 이름들은 공개되지도 않을거고, 약사는 훈방조치될거다, 모골클럽들도 영업들을 재개할거다. 그러니, 운명들을 거슬러 발길질만 해봐야 도대체 무슨 소용들만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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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들이 얼마나 후퇴했는지는 대중조직들에 상태뿐만 아니라 사상집단들이나, 그 집단들로부터도, 관여했던, 이론적 연구들에 결과를 봐도 가늠할 수 있겠다. 파리에서 출간된 <크 페르, 무엇을 할건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스스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좌파, 지배계급들에 지식인들이나, 지식인들에 모든 악습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고립된 노동자들에 경험주의에서조차도 한 치도 벗어나지도 못한다. 

과학적인 기초마저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강령도, 전통마저도 없는, 여느 집단들이나 마찬가지로, 이 시시한 잡지들 마저도 그저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에 편승하려고만 했었다. POUM이야말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승리로 이르는 첩경을 제시한 정당이라고만 생각한거다. 그러나 <크 페르>도 이렇게나 스페인 혁명에서나 연관만을 맺는 결과는 처음부터는 커녕 완전하게도 기대마저도 어긋난듯하다. 그래서 이 잡지로는 발전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했었다. 이건 완전하게도 당연한 결과다. 새로운지배계급들에 보수성이나 무산계급혁명들에 대한 필요성 사이에서도 모순들은 극단으로도 치달았기 때문이다. POUM정책들을 그저 옹호하고, 해명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적·이론적 영역에서도 크게 되보한다는 건 지극하게도 당연하다. 

<크페르> 자체로는 전혀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흥미로운 징후를 잘 보여준다. 스페인혁명으로는 패배원인들에 대한 이 잡지들에 평가를 천천히 곱씹어 보는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주된 이유로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더욱이나 이러한 평가로는 사이비 마르크스주의 좌파 진영들에도 널리 펴진 근본적 특징들을 매우 생생하게만 보여준다. 카사노바 동지마저도 쓴 소책자 <배반당한 스페인>에 대한 <크 페르>에 서평들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한 번 시작해보자. 


"왜 혁명마저도 분쇄됐는가." 카사노바 저자는 다음으로 같이 답변한다. "공산당은 잘못된 정책들을 펼쳤고, 불행하게도 혁명적인 대중들은 이를 그저 따르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대체 왜 혁명적 대중들은 옛 지도자들을 버리고 공산당에 깃발 아래로 결집했던가. "왜냐하면 진정한 혁명정당들 마저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순수한 동어반복들일 뿐이다. 대중들에 잘못된 정책들이나 미숙한 정당들로는 사회세력들에 특정한 상태들, 노동계급들에 미숙, 농민들에 대한 독립성 부족으로 나타내고, 이런 상태로는 사실들을 바탕으로도 설명돼야만 한다. 특히나 카사노바 같은 사람들은 그런 설명들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러지도 않는다면, 사회세력들에 상태는 악의를 가진 개인이나 집단들에 행동결과로 되는데, 그런 행동들은 유일하게 혁명들을 구할 수 있는 '진지한 개인들'에 대한 노력들마저도 부합하지도 않는다. 카사노바는 처음에 마르크스주의에 길을 더듬더듬 찾다가 결국 두 번째로 길로 들어선다. 여기서 우리는 순수한 악마학에 영역으로도 안내된다. 패배에 대한 책임마저도 있는 범죄자로는 대마왕 스탈린도 있었고, 여러 아나키스트들이나, 여러 작은 악마들마저도, 스탈린을 부추길 수 있었고, 혁명가들에 신으로는 유감스럽게도, 1917년에 러시아와는 달리, 스페인에서는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보내주지도 않았다는거다. 


따라서 결론으로는 다음으로 같다. "이건 교회는 화석화한 정설들로부터도 사실에 강요하려 할 때는 빚어지는 결과다." 이런 이론적 오만함들을 더욱이나 돋보이게 하는 건, 보수적인 속물들에 진부함들, 천박함들, 오류들을 그토록 짧은 문장들로부터도, 그토록 많이 보여 줄 수도 있었다는 사실들에 있었다. 위에 인용문 저자로는 여러 스페인 혁명들은 왜 패배했는지를 결코 설명하지조차도 않았다. 단지 '사회세력들에 상태'와도 같은 모호하고, 심오한 설명들만 그저 필요하다고 지적할 뿐이었다. 그 저자로는 설명들을 회피한다는 건 우연조차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볼셰비키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론적 겁쟁이들이다. 그들에게는 확고한 독자적인 견해들마저도 전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들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파산들을 드러내지도 않으려고 사실들을 왜곡하고, 다른 사람들에 견해를 기웃거린다. 그들은 마치 시간마저도 없어서, 자신들에 지혜를 충분하게도 보여주지도 못하는 어린 양에 대한 넌지시 암시나, 어중간한 생각들만 내비칠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에게는 지혜라고 할 만한 건 전혀 없었다. 그들에 오만함에는 지적허풍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저자들에 암시와 어중간한 생각들을 하나씩 분석해보자. 그는 대중들에 잘못된 정책들을 '사회세력들에 특정한 상태들', 곧 노동계급들에 미숙이나 농민들에 독립성 부족들ㄹ로 보여주는 걸로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보바도 더 명백한 동어반복들 마저도 찾기란 힘들거다. '대중들에 잘못된 정책들'은 대중들에 '미숙들'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들에 대한 '미숙'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마디로 잘못된 정책들에도 빠지기 쉬운 경향이다. 잘못된 정책들에 내용이란 무엇인지도, 누가 그 정책들을 주도했는지, 대중인지, 지도부인지, 등에 대해서도 저자는 줄곧 침묵해왔었다. 동어반복으로부터도 그는 대중들에게 그저 책임들을 전가한다. 모든 배신자와 이탈자, 그리고 그들을 옹호하는 자들에 대한 이런 고전적 속임수로는 특히나 스페인 무산계급들로부터도 혐오감마저도 불러일으킨다. 


1936년, 7월에도 이전 시기는 거론조차도 하지 않겠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민중전선들에 대한 비호를 받으면서도 음모를 꾸미고, 온 장교들에 공격들을 격퇴했었다. 대중들은 성급히도 시민군들을 조직했고, 장차 무산계급들에 요새로 될 노동자위원회들을 건설했었다. 반면에, 무산계급들에 대한 지도적 조직들은 지배계급들에게도 노동자위원회들을 파괴하고 사유재산들에 대한 노동자들에 공격들을 무위로도 돌리고 노동자 시민군들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줬었다. 더욱이나, POUM으로는 정부에 참여해서도 이런 반혁명적인 활동들에 책임마저도 떠맡기까지 햇었다. 이 경우에도 무산계급들에 '미숙'으로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명한 사실로는 이것뿐이다. 곧, 대중들은 올바른 정치적인 노선들 마저도 선택했는데도 사회주의자, 스탈린주의자, 아나키스트, POUM이나 지배계급들에 연립정부를 분쇄할 수는 없었다는거였다. <크 페르> 저자에 이런 궤변으로는 무슨 절대적인 성숙한 개념들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곧, 올바른 지도부는 필요조차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에 지도부를 거슬러서는 승리할 수도 있는 대중들에 완벽한 상태로만 가정한다. 그러나 그런 성숙으로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겠다. 


우리에 현혁자들은 다음들로 같이 반문한다. 그렇게 올바른 혁명적인 본능들이나, 뛰어난 투쟁능력들 마저도 보여준 노동자들은 왜 배신적이던 지도부들에 굴종했던가. 우리들에 대답으로는 이렇다. 굴종에 낌새들조차도 없었다. 노동자들에 행진방향으로는 언제나 지도부에 방향으로도 어느정도 엇나갔다. 그리고 매우 결정적인 순간들에는 방향으로도 서로 정반대마저 됐었다. 그러면 지도부는 무력적으로도 노동자들을 굴복하고자한다는 걸 직간접적으로 도왔다는 말도 된다. 1937년 5월 카탈루냐에 노동자들은 지도부도 없이도, 아니 지도부를 거슬러서 봉기했었다.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손쉽게 혁명가들로부터 위장한 가련하고, 한심한 지배계급들은 자신들에 신문에서도 다음으로 같은 말들을 수백 번도 더 되풀이했었다. 곧, 전국노동자연맹으로는 5월에 권력들을 장악해서는 자신들에 독재정권들을 세우기를 원했다면 별 어려움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거라고 말한다. 이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에 말들은 완전하게 진실이었다. POUM지도부는 사실상, CNT에 꽁무니나 따라다니면서 CNT에 정책들을 다른 문구로 포장만해줬을 뿐이다. 지배계급들로부터도 '미숙한' 무산계급들에 대한 5월봉기를 분쇄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 덕분이었다. 스페인 대중들은 지도부를 따르기만 했다는 공허한 말들을 반복해서는 계급이나, 당, 대중들이나 지도부 사이에서도 상호관계들에 대해서는 무엇조차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로는, 대중들로 언제나 올바른 길로 나아가려고, 분투했지만, 투쟁들에 불길 속에서도 혁명들에 요구에 부응하는 새 지도부를 건설할 수는 없었다는거다. 우리는 살펴보는 대단하게도 역동적인 과정들에서는 혁명들에 여러 단계들은 급변하고, 지도부로부터 여러 분파들은 계급들에 대한 적진으로 재빨리도 도주한다. 그러나 우리들에 현학자들은 다음으로 같이 순전하게 정적인 논의를 하고 있었다. 노동계급 전체는 왜 잘못된 지도부를 따랐는가. 진화론적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오래된 경구마저도 있었다. 모든 나라들에서 국민들은 자신들에 수준들에만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거다. 그러나 역사를 보자면, 똑같은 국민들은 비교적 짧은 시기들 동안에도, 사뭇 다른 정부들을 가질 수 있었고, 러시아,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으로부터도 역사를 보라. 더욱이나 이러한 정부들은 수립되는 순서로는, 진화론적 자유주의자들에 생각으로는 달리, 전제정부들에서도, 자유주의 정부로 나아가는 동일한 방향으로는 절대로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비밀로는, 국민들은 적대적인 계급들로 구성돼있었고, 계급들 자체마저도 서로 다른 지도부를 따르는 서로 달른 계층들, 부분적으로는 서로 적대적인 계층들로만 이뤄졌다는 사실들이다. 더군다나 모든 나라들에서도 국민들은 다른 나라 국민들도 역시나 계급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영향들을 직간접적으로도 받는다. 정부는 체계적으로도 성장하는 '국민'들에 '성숙'들을 나타내는 건 아닌지라, 상이한 계급들 간에 투쟁들이나, 동일한 계급들 내에서도, 상이한 계층 간에 기층적인 투쟁들에 산물들이고, 마지막으로는 동맹·갈등·전쟁 등으로부터 같은 외부적인 힘들도 작용한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한, 정부는 한번만 수립되면, 그 정부를 만들어낸 세력관계들보다도, 훨씬 더 오래 지속될 수도 있따는 점도 덧붙여야만 한다. 바로 이런 역사적 모순들로부터도 말미암아서, 혁명·쿠데타·반혁명 등도 일어난다. 한 계급들에 지도부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도 이와 똑같은 변증법적인 태도도 역시나, 마찬가지로도 필요해진다. 우리에 현학자들은 그저 자유주의자들을 모방해서는 모든 계급들은 자신들에 수준에만 맞는 지도부를 따른다는 경구를 암묵적으로도 그저 받아들인다. 사실상, 지도부는 한 계급들로부터도 단순한 '반영'들도 아니고, 스스로 자처한다고 해서도 될 수 있는거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도부는 상이한 계급들에 투쟁과정들이나, 특정계급들 내에서도 상이한 계층들 사이에서도 마찰과정들에서 형성된다. 지도부는 일단 형성되면, 항상 자기계급들을 넘어서기는 마련이고, 그래서도 다른 계급들에 대한 압력이나 영향들로부터도 받게 된다. 무산계급들로는 지도부에서도 이미 내부적으로도 완전하게도 변질됐는데도, 중대한 사건들로부터 그런 변질들을 아직은 드러나지도 않았을 때 그 지도부를 오랫동안 '용인'할 수 있었다. 지도부와 계급들 사이에서 모순들로부터 첨예하게 드러나려면, 거대한 역사적 충격들마저도 필요해진다. 매우 강력한 역사적인 충격들로는 전쟁이나 혁명들이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흔히들 노동계급들에게는 느닷없이도 전쟁이나 혁명들에도 휘말린다는거다. 그러나 옛 지도부들에서도 내부부패마저 드러난 경우로도, 게급들은 당장에는 새 지도부를 급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특히나 기존에 지도적 정당들은 붕괴한 상황들로부터도 이용할 수 있는 강력한 혁명적인 간부들을 이전 시기에서도 물려받지도 않았다면 더 힘들기 때문이다. 계급들이나 지도부들에서도 상호관계들에 대한 현학적인 해석마저도 아닌,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들, 곧 변증법적인 해석들로는, <크 페르>저자들에 대한 형식주의적인 궤변들을 완전하게도 논파한다. <크페르> 저자로는 무산계급들에 성숙들을 순전하게도 정적인걸로만 여긴다. 그러나 혁명기에는 한 계급들에 의식들로는 혁명들에 진로를 직접 결정하는 매우 역동적인 과정들이다. 1917년 1월에, 심지어 차르체제들로부터도 전복된 뒤인 3월에조차도, 러시아 무산계급들에게는 8-9개월 뒤 권력들을 잡을만큼도 충분하게 '성숙'할지를 묻는 질문들에 과연 대답이나 할 수 있었을까. 당시에도 노동계급들은 정치적·사회적으로도 매우 이질적이기만 했었다. 전쟁들을 수행하는 동안에서도 노동계끕들에 30-40%는 흔히 반동적인 새로운지배계급들에 출신들로도 교체됐었는데, 이들은 후진적인 농민들, 여성들, 청년들이었었다. 1917년 3월에도 볼셰비키당들을 지지한 노동계급들은 하찮은 소수들에 불과했고, 더구나 당내에는 의견 충도를도 있었다. 노동자들에 압도다수로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곧 보수적인 사회애국주의자들들 지지했었다. 군대와 농촌에서는 상황마저도 더 불리해졌다. 여기에 다음에 사실도 덧붙여야만 한다. 러시아는 문화수준들로부터도 대체로도 낮았고, 농민들이나 병사들은 물론 광범위한 무산계급들에 대중들도 정치경험들마저도 부족했었다. 특히나 지방에서는 그랬었다. 볼셰비키들에 '유동자산'들은 무엇이었는가. 오로지 레닌만이 혁명초기부터 분명하고 일관된 혁명개념들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당에 간부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로도, 상당하게,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에서는 선진노동자들에게만 권위는 있었고, 레닌에게는 당간부들에게만 커다란 권위만 주어졌었다. 레닌에 정치적인 개념들로는 혁명에 대한 실제전개과정들로부터도 잘 맞아떨어졌었고, 새로운 사건들도 일어날 때마다, 더욱 강화됐었다. 이러한 '자산'들은 혁명적인 상황들, 곧 격렬한 계급투쟁들에 상황들에서도, 기적들을 만들어냈었다. 당에서도 레닌으로부터 제시했던 개념들에도 맞게도, 곧 혁명들에 대한 실제과정들에 맞게도 재빠르게 정책들을 조정했다. 덕분에 수많은 선진노동자들에게는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혁명에 대한 발전과정들에도 바탕을 둔 덕분에 당은 몇 달 만에 다수노동자들에게도 당에 구호는 올바르다는 걸 확신하게 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로 조직된 대다수 노동자들에게는 이번에는 병사와 농민들을 끌어당길 수도 있었다. 역동적·변증법적인 과정들로 어찌해서 무산계급들에 성숙 또는 미숙이라는 공식으로도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1917년 2월이나 3월에도 러시아 무산계급들에 대한 성숙에서도 엄청나게 중요한 요인들도 바로 레닌이었었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그는 노동계급들에 혁명적인 전통들에 화신이었다. 레닌에 구호로는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비록 처음에는 수마저 적더라도, 간부들은 존재해야만 했었다. 또한, 지도부들에 대한 ㄱ간부들에 신뢰, 곧 과거에 모든 경험들을 바탕으로도 한 신뢰들마저도 있어야만 했었다. 이러한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건 생동하는 혁명들을 무시하고, '세력관계'라는 추상으롼 대체하는거다. 왜냐하면 혁명에 대한 발전과정들에서는 무산계급들로부터 의식마저도 바뀌고, 후진부위는 서진부위로도, 이끌리고, 계급들에 대한 자신감은 더욱 증대함에 따라 세력관계로는 끊임없이도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과정에서 핵심동력은 다름아닌 당이다. 당에 메커니즘에서 핵심동력들도 지도부이듯이 말이다. 혁명기에 지도부에 대한 구실들이나 책임들은 막중하다. 10월 혁명들에 대한 승리로는 무산계급들에 대한 '성숙'들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다. 그러나 이 성숙은 상대적이다. 몇 년 뒤 바로 그 무산계급들롭부터는 자신들에 대열에서도 성장한 관료들은 혁명을 교살하도록 허용했었다. 승리는 무산계급들로부터도 '성숙'한 결과로 얻게되는 다 익은 열매는 그저 아니기 때문이다. 승리는 전략적인 과제들이다. 대중들을 동원하려면, 혁명적 위기라는 유리한 상황들을 이용할 필요도 있다. 특정 수준들에 '성숙'들을 출발점으로도 삼아서, 대중들로부터도 앞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해야만 하고, 또한 적들에게는 결코, 전능하지도 않고, 오히려 모순들로 사분오열해 있고, 겉으로는 당당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공황상태에만 빠져있었다는 걸 대중들에게도 이해하게해야 하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당에서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면 무산계급혁명에서 승리는 말조차도 꺼내지 못했을거다. 소비에트는 반혁명으로 오래 전에 파괴됐을거고, 따라서 전 세계에 비열한 현학자들은 러시아에서 오직 몽상가들만이 너무 소수인데다, 너무 미숙한 무산계급독재를 꿈꿨다는 내용들에 책들이나 글들만 써댔을거다. 
마찬가지로 농민들에 대한 '독립성부족'들도 운운하는 주장들도 심지어는 추상적·현학적이고 잘못됐었다. 우리에 현학자들에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농민들은 독립적인 혁명적인 강령들이나, 독립적인 혁명적 주도권들을 가진 경우를 도대체 언제 어디서 봤던가. 농민들은 혁명에서도 매우 중대한 구실들을 할 수 있지만 단지 보조적 구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많은 경우에도, 스페인 농민들은 대담하게 행동하고, 용감하게도 싸웠었다. 그러나 농민 저체를 봉기하게하고자 하려면, 무산계급들은 지배계급들에 맞선 결정적인 봉기들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줘서, 농민들에게도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들을 줘야만 했었다. 그러나 무산계급들에 혁명적인 주도권 자체로는 번번이 무산계급 자신들에 조직들에 의해서도 마비됐었다. 무산계급들에 '미숙', 농민들에 대한 '독립성 부족'들에는 역사적인 사건들에서 궁극적인 요인들도 아니고, 근본적인 요인들도 아니다. 따라서 계급의식에 근저에는 계급에 대한 존재, 자체들로, 계급에 대한 인원수들, 경제생활에서 계급들로부터 할 수 있는 구실들로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급에 근저에는 곧 생산력 발전 수준들에 조응하는 특정한 생산체제들도 놓여 있게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스페인무산계급들에 대한 패배는 그저 낮은 기술수준들 때문이라고 말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에 저자는 역사과정들에서도 변증법들을 기계적 결정론으로만 대체한다. 그래서 좋든, 나쁘든, 개인들이 하는 구실들을 저속하게도 비웃는다. 역사는 곧 계급투쟁들에 과정들이다. 그러나 계급으로는 자신들에 중요성들을 저절로, 그리고 동시에 깨닫지도 못한다. 투쟁과정들에서는 계급들은 다양한 조직들도 만들어내는데, 조직들은 중요하고, 독립적인 구실들도 하지만, 과정에서는 변형마저도 겪을 수밖에는 없게된다. 또, 역사에는 개인들도 하는 구실들에 토대마저도 되기도 한다. 물론 히틀러에 독재정권들을 만들어 낸 중요한 객관적인 원인들도 있었지만, 그저 '결정론'들로 사로잡힌 우둔한 현학자들만이 오늘날 히틀러에 엄청난 역사적인 구실들을 무시할거다. 1917년 4월 3일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덕분에, 볼셰비키당은 제때로 바뀔 수 있었고, 혁명들을 승리로 이끌 수도 있었다.

우리들에 현학자들은 레닌도 1917년 초에 외국에서 죽었더라도, 10월혁명은 '그대로' 일어났을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도 않다. 레닌에게는 역사적 과정들로부터도, 생동하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무산계급들에 매우 능동적인 부문들에 대한 경험들이나 통찰력들에도 화신이었다. 무산계급들에 전위를 움직이고, 그들에게는 노동계급들이나 농민대중들에게도 규합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레닌으로부터 혁명무대에도 제때 등장하는 건 꼭 필요했다. 역사에 전환점이라는 결정적인 순간들에 정치적 지도부는 전쟁에 대한 결정적인 순간들에도 총사령부나 하는 구실만큼이나 결정적인 요인들이다. 역사는 자동적 과정들도 아니기 때문에, 역사는 그저 자동적인 과정들이라면, 지도자는 도대체 왜 필요하겠는가. 당강령, 이론적 투쟁들로부터도 또 왜 필요하겠는가. 

앞서 봤듯이, <크페르>에 저자는 "그러나 도대체 왜 혁명적인 대중들은 옛 지도자들을 버리고, 공산당에 깃발 아래로 결집했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나 질문들은 잘못 제기됐다. 혁명적인 대중들에 옛 지도자들을 모두 버렸다는 건 사실마저도 아니기 때문이다. 전에 특정조직들로부터도 연계돼 있던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조직들에 연연하면서, 지켜보고, 확인했다. 대체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일깨워서 의식적인 삶을 살게 해 준 당으로부터도 쉽게 떠나지도 못한다. 더구나 민중전선 내에 존재하는 상호보호라는 분위기는 노동자들을 안심하게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동의했으니, 모든 일들은 잘 풀릴거다.' 새롭고 경험 없는 대중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코민테른들로부터 의지했다. 왜냐하면 코민테른은 유일하게 무산계급혁명들에 성공한 정당들이었고, 틀림없이도, 스페인에 무기를 제공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코민테른으로는 민중전선 사상들을 매우 열렬하게도 옹호했다. 경험 없는 노동자들에게도 자신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민중전선 내에서도 코민테른으로는 혁명에 대한 지배계급들에 대한 성격들을 매우 열렬하게도 옹호했다. 새로운지배계급들로부터도, 부분적으로는 중간지배계급들에게도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들은 "공산당이라는 깃발 아래로 결집했다." 

<크페르> 저자로는 무산계급들에게 신발 많은 신발가게들에서 새 구두를 고르는 문제인 양 사태를 묘사한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이렇게 단순한 일조차도 매번 성공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새 지도부를 선택하는 일로는 훨씬 더 제한만 많기 때문이다. 광범위한 대중들에게는 오직 점진적으롼, 그리고 여러 단계를 거친 자신들에 경험들에 근거해서만, 새로운 지도부는 옛 지도부보다도 더 확고하고, 더 믿을만하고, 더 충실하다고, 확신하게 된다. 확실하게, 사태는 급변하는 혁명기에는 허약한 당도 혁명에 대한 진로를 명쾌하게, 이해하고, 확고한, 간부들, 미사여구에 도취하지도 않고, 박해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보유하고 있다면, 강력한 당으로 금세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당으로는 혁명 이전에도 준비돼 있어야만 한다. 간부들을 훈려하게하고자 하려면, 상당한 시간마저도 필요해지는데, 혁명에서는 이런 시간들 마저도 허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POUM으로는 스페인에서 매우 왼쪽에 있는 정당들이었고, 혁명 전에는 아나키즘을 굳게 신뢰하지도 않는, 혁명적인 노동잗르을 포함하고만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당으로부터도 스페인혁명들에 대한 전개과정들로부터도 치명적인 구실들만 해왔기 때문이다. POUM으로는 대중정당으로는 성장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대중정당들로 될면 먼저 기성정당들을 무너뜨려야만 했는데, 이건 비타협적인 투쟁들로만, 그리고 기성정당들에 지배계급적인 성격들을 가차없이 폭로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POUM으로는 기성정당들을 비판하면서도,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로는, 오히려 그들에게 종속됐다. POUM으로는 '민중' 선거연합들에도 참가했었고, 노동자위원회를 해산한 바로 그러한 정부들에도 들어갔고, 이러한 연립정부를 재건하는 투쟁에도 참여했고, 아나키스트 지도부에도 거듭거듭 굴복해왔고, 이와 관련해서는 잘못된 노동조합정책들마저도 실행해왔고, 1937년 5월 봉기에 대해서는 주저하고, 비혁명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결정론에 대한 관점으로는, POUM에 정책들은 그저 우연마저도 아니었다고, 인정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는 나름대로 원인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POUM에 중간주의를 낳는 여러 원인들이나, 스페인이나, 카탈루냐무산계급들에 상황들을 반영한 건 결코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 인과관계는 서로 비스듬하게 접근하다가도, 어느 순간들로는, 적대적으로만 충돌했을 뿐이었다. POUM마저 중간주의 정당으로 전락한 이유를 정치적·심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과거에 국제적인 경험들, 소련에 영향들, 수 많은 패배들에 대한 영향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POUM에 대한 중간주의 성격마저도 바뀌는 거도 아니고, 중간주의 정당들은 언제나 혁명에 걸림돌 구실들을 해왔고, 자기발등만을 찍고 혁명들에 패배를 수도 있다는 사실들마저도 바뀌는 거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카탈루냐 대중들에게는 POUM보다도 훨씬 더 혁명적이었고, POUM에 평당원들도 지도부들보다도 훨씬 더 혁명적이었다는 사실마저도 그리 쉽게 바뀌는거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정마저 그러한데도, 잘못된 정책들로부터 대중들에 '미숙함'을 탓으로만 돌리는 건 정치적 파산자들이나 흔히 의존하는 순전한 허풍들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왜곡으로는 다음으로 같다. 스페인 대중들에 패배에 대한 책임들은 대중들에 대한 혁명적인 운동들을 마비하게하거나, 심지어는 분쇄한 이러한 정당들만이 아니라, 노동대중들에게도 있다는거다. POUM옹호론자들도 지도부들에 책임들을 한사코 부정하면서도, 자신들에 책임마저도 회피하려고 한다. 이런 무기력한 철학들로는 패배를 보편적인 발전과정들에 필수적인 연결고리로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에, 패배를 자초한 강령, 당, 개인들로부터도 구체적인 요인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게하고, 제기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숙명론이나 굴종에 철학들로는 혁명적인 행동들에 이론들인 마르크스주의와도 정반대된다. 

내전으로는 정치적인 과제들로부터 군사적인 수단들로도 해결되는 과정들이다. 전쟁에 대한 결과로는 '계급세력들에 상태'에 따라서 결정된다면, 전쟁, 자체로는 필요하지도 않을거다. 전쟁으로는 자체에 따른 조직들, 자체에 따른 정책들, 자체에 따른 방식들, 자체에 따른 지도부들도 있고, 이런 건 대체로도, 전쟁들에 운명으로부터도 직접적으로 결정한다. 당연하게도 '계급세력들에상태들'마저도 다른 모든 정치적인 요인들에 토대로 된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물에 토대로부터 벽, 창문, 문, 지붕들에 중요성들을 감소하게하지는 않듯이, '계급세력들에상태'로는 당, 전략, 지도부에 대한 중요성들 마저도 없애지는 않는다. 우리들에 현학자들은 구체적인 걸 그저 추상적인 걸로만 해소하게하면서도, 정말로 중간에서만 멈춰버렸었다. 그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는 매우 '심오한' 해법으로는 생산력발전들로부터도 불충분해서는 스페인무산계급들로는 그저 패배했다고만 말하는 거겠지만, 이런 말들은 바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 현학자들은 당이나 지도부에 대한 중요성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다보니 대체로는 혁명적인 승리로부터도 할 수 없다고 부인한다. 왜냐하면 더 유리한 상황들을 기대할 근거들마저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들에 대한 발전들은 늘 중단됐었고, 무산계급들에 대한 수로는 크게 증가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실업자만 더 늘어나는 판국이기 때문이다. 이건 무산계급들에 투쟁력을 증대하게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감소하게하고, 그들에 대한 계급의식에서도 부정적인 효과만을 미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들에서도, 농민들은 더 높은 혁명적인 의식들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을만한 근거조차도 없다. 따라서 <크페르> 저자에 분서에서 나오는 결론으로는, 혁명적인 전망들에서도 벗어난 완벽한 비관주의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욱 공정하게 말해보자면, 이 저자는 자신에게 한 말마저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반증하기 때문이다. 

사실, <크페르> 저자는 대중들에 의식들로부터도, 제기하는 요구들마저도 완전하게 환상일 뿐이다. 스페인농민들이나 노동자들에게는 혁명적인 상황들에서도, 자신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줬었다. 우리는 바로 이들 계급들에 대한 수백만, 수천만 명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페르>는 이처럼 시시한 학파들이나, 교파들, 가운데서 하나일 뿐이다. 그들로는 투쟁에 경로와 반동들에 시작에도 겁을 먹기만 했었고, 대중운동들은 물론 혁명적인 사상들이나 실제발전과정들에서도 멀리 떨어진 채로, 처구석에서 하찮은 잡지들이나, 이론적인 습작들을 그저 재출간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무산계급들로는 제국주의자, 스페인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스탈린주의자와 좌파인 POUM으로 구성된 연립정부들로부터 희생됐다. 그들은 스페인무산계급들도 정말로 실현하기 시작했던 사회주의혁명들마저도 완전하게 마비하게만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들을 제거한다는 건 그리 쉽지도 않다. 무자비한 탄압, 선진부위학살, 지도부처형, 등에 방법들 말고도 다른 방법으로는 아직까지도 고안되지도 않았다. 물론 POUM으로는 이런 걸 원하지조차도 않았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공화국정부들에도 참여해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충실한 반대팔로 집권당 진영으로 들어가고자만 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해할 수 없는 내전에 문제로 정작 닥쳤을 때는 평화적인 동지관계를 그저 유지하고자만 했었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POUM으로는 자신들에 모순된 정책들로부터 희생되고 말았다. 집권당 진영에서도 매우 일관된 정책들을 추구한 건, 정작 스탈린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지배계급들에 공화주의 반혁명들을 위해 싸우는 전위들이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들 자신들에게도 '민주주의' 기치 아래에서도 무산계급들에 혁명들마저도 교살할 수 있음을 스페인이나 전 세계 지배계급들에게도 입증해서는 파시즘에 대한 중요성들을 제거하려고만 해왔었다. 이건 그들 정책들에서도 요점들이었었다. 오늘날 스페인 민중전선들이나 파산자들로는 게페우GPU를 비난하고, 책임들마저도 전가한다. 확신컨대, 우리는 GPU에 범죄들에도 관용마저도 베풀 수는 없겠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들로부터 같은 사실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따라서 노동자들에게도 이렇게도 말해야만 한다. GPU는 민중전선들에 헌신하는 매우 단호한 파견대 구실만을 했을 뿐이었다고 말이다. 여기에 GPU에 대한 강점도 있었고, 스탈린에 역사적 구실들마저도 있어왔었다. 단지 무지한 속물들만이 대마왕에 대한 어리석은 농담들을 지껄이면서 이 사실들을 무시할 수 있을 뿐인지라.

이 신사양반들로는, 혁명들에 대한 사회적인 성격들이라는 문제를 놓고 고민조차도 하지 않는다. 소련에 충실했던 부하들은 영국이나 프랑스를 위해서도, 스페인혁명들로부터도, 그저 지배계급들에 혁명이라고만 선언해왔었다. 이런 속임수를 바탕으로도 민중전선들은 배신적인 정책들만을 수립하게 됐다. 민중전선들에 정책으로는 스페인혁명들로부터 정말로 지배계급들에 혁명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완전하게 잘못된 정책들이었을거다. 그러나 스페인혁명들은 처음부터 1917년 러시아혁명때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무산게급적인 성격만을 드러냈었다. 오늘날 POUM 지도부들 내에서도 신사양반들은, 안드레우닌에 정책들로부터도 너무 '좌파적'이었다고, 진정한 올바른 정책들은 민중전선들 내에서도 좌파로 남아있는거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불행으로는 닌은 레닌으로부터 10월 혁명에 대한 권위를 한 몸에 누리면서도, 민중전선들로부터도, 결별하기로 결단들을 내리지는 못했다. 중요한 문제들에서도 경솔한 태도만을 취해놓고는, 스스로 체면만을 구기는 빅토르세르주는 닌이나, 오슬로나, 코요아칸들에 명령들을 따르고 싶어하지도 않았다고만 썼었다. 진지한 사람이었더라도, 과연 혁명에 대한 계급적 내용이라는 문제를 그저 하찮은 잡담거리로만 다룰 수나 있었을까. 

<크페르>에 현학자들로는 이런 물음들에도 결코 답하지도 못한다. 그들로는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한 건 다음으로 같은 사실들이다. 곧, '미숙한' 무산계급들로부터는 자신들에 권력기관들을 세우고, 기업들을 접수하고, 생산들을 규제하려고만 했으나, POUM으로는 지배계급아나키스트들로부터도, 분열하지는 않으려고, 갖은 애를 무진장 써왔기만 했었고, 이 아나키스트들은 정작 지배계급사회주의자들이나, 스탈린주의자와는 말할거도 없었고, 심지어는 지배계급공화주의자들로부터도, 동맹들을 맺었고, 무산계급들에 혁명들을 공격하고, 교살했다는거다. 이런 '하찮은' 이야기로는 '화석화한 정설'들에 대표자들에게만 그저 중요할 뿐이었다. 오히려 <크페르>에 현학자들로는 혁명적인 계급전략들에 대한 모든 문제와도 무관하게도 그저 무산계급들에 성숙정도와 세력관계를 측정하는 특별한 도구들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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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자체가 그렇게 좋지는 않는 저작이다. 그래도 옮겨는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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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건 그 논설 가운데 한 구절이다. 그건 확실하게도 우리는 흥미있는 주제로는 그저 떨어져있듯이만 보이지만, 라데크는 현재에 중도파 이론가로 변신하는거와도 일치하기 때문에 이 주제와도 긴밀하게 결합돼 있다. 나는 여기서 라데크는 일국사회주의론으로 몰래 나아갔음을 이야기해보겠다. 라데크에 오류들 가운데로는 이런 '부차적인 걸로' 이 이후에도 또 발전과정들에서는 명백하게 양질전화하면서 다른 모든 의견차이를 압도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혁명을 위협하는 외부로부터 위험에 대해 논의하면서, 라데크는 레닌은, 1905년 당시 러시아에 경제발전수준들에서는 무산계급 독재로는 서유럽 노동자들만이 도와줄 때에만 비로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들을 깨닫고 있었다."라고만 쓰고있다. 강조는 트로츠키.


오류는 오류를 낳는다. 이 오류는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전망들에 대한 아주 조잡한 모독이다. 실제로도 레닌은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독재 결코 무산계급들에 독재마저도 아니라는 유럽에 사회주의 혁명들 없이는 유지될 수 조차도 없을거라고 여러 차례나 이야기해왔다. 이러한 생각들로는 1906년, 스톡홀름 당 대회 당시로도 레닌에 논설이나 연설 전체에서도 걸쳐서 일관되게만 흐르고 있었다. 플레하노프오 벌인 논쟁들, 국유화 문제 등으로부터. 당시에도 레닌은 서유럽 사회주의 혁명들 이전에도 건설될 러시아에 무산계급들에, 독재들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한 적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그건 현재까지도 중요하지조차도 않았다. "1905년 당시에 러시아에 경제발전수준이라는"이라는 구절에 대한 뜻으로는 과연 무엇일까. 또한 1917년 수준에서는 문제는 과연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일국사회주의론은 바로 이러한 발전수준들에 차이에 기초하고 있었다. 코민테른 강령들은 전 세계를, 자립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충분한" 발전 수준들에 이른 지역들이나 그렇지 못한 지역들로도 구분하고, 나아가 혁명전략들이랍시고, 일련에 절망적인 막다른 골목길들을 만들어냈다. 경제수준에 차이로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노동계급들에 대한 정치역량들에 결정적인 중요성들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1905년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무산계급 독재로까지도 고양하게할 수는 없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마찬가지로는 민주주의 독재에도 도달할 수도 없었다. 1917년에 우리는 민주주의 독재를 포괄하는 무산계급들에 독재를 수립했다. 그러나 1905년도 마찬가지로 1917년에 경제발전 수준에서도 독재로는 서유럽 무산계급들을 적절하게 도와줄 때에야 비로소 유지되고 사회주의로도 발전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이 '적절함'으로는 선험적으로도 계산할 수는 없었고, 발전들이나 투쟁들 과정에서만 결정된다.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의의마저도 있던 국제세력 관계들로부터 결정되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비한다면, 1905년이나 1917년에 러시아 발전 수준들에 차이로는, 비록 그 자체로는 중요한 거지만, 부차적인 요소들일 수밖에는 없겠다. 그러나 라데크는 이러한 수준 차이를 애매하게 언급하는데 만족하지는 않는다. 레닌은 혁명에 대한 국내문제와 국제문제 사이에 연관성들을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사실을 먼저 언급하고 나서는 라데크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레닌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독재를 유지한다는 건 서유럽 무산계급들한테서도 원조를 받는 사이에 연관만을 극단화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트로츠키에 대한 정식들로는 그걸 과도하게만 극단화해서는 국가원조들이나, 곧 이미 승리한 서유럽 무산계급들에 대한 원조들마저도 아니면 안 된다고도 했었다. 강조는 트로츠키. 


솔직하게는 이 구절들도 읽었을 때는 나는 내 눈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조차 없었다. 무슨 목적에서 과연 라데크는 속물들이라는 무기고에서도 이런 치졸한 무기를 구해왔을까. 이건 우리는 늘 너무나 철저한 유희라고만 생각하던 스탈린주의적인 진부함들에 대한 낯부끄러운 재탕들에도 불과하다.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위에 인용문들은 라데크는 레닌으로부터도 겪은 기본적이고, 획기적인 사건들을 거의 알지도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이나 레닌으로는 지배계급들에 대한 권력들에 대해 유럽 무산계급들에 압력이나 무산계급들에 권력장악들을 결코 대비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외부에 혁명적인 원조들에 대한 문제를 나보다도 훨씬 더 날카롭게 정식화했었다. 일차 혁명 시기로는 그는 유럽에 사회주의혁명 없이는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조차도, 유지할 수 없을거라고는 쉬지 않고도 되풀이해 말해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1917-1918년에 이후로 시기에는 레닌은 유럽에서부터 시작됐던 사회주의혁명으로부터도 연관되지도 않는 다른 무슨 방식들로든 우리들에 혁명에 대한 운명들을 생각해보거나, 평가해본 적도 없었다는거다. 이를테면 그는 "독일혁명에 승리 없이는 우리는 끝장이다."라고 공공연하게도 주장했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1905년에 "경제적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1918년에도 했었다. 그리고 그는 몇 십년 후에도 미래는 아니라 당면했던 시기, 곧 몇 달은 아니더라도, 몇 년간에 문제들로부터도 염두해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수십 번이나 넘게 이렇게도 선언했다. 우리들로부터 계속해서 지탱해왔던 "그 이유로눈 운 좋은 상황들로 그저 겹쳐서 우리를 잠시동안만큼은 세계제국주의로부터 보호해주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만 말이다. 그리고 계속이어진다. "세계제국주의는 무슨 상황에서도, 무슨 조건들에서도 소비이트공화국으로는 병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충돌마저도 불가피해진다." 그리고 결론으로는, 무산계급들에 대한 '압력'이나 지배계급들에 대한 '중립화'에 대한 평화주의적 소망마저 아니던가. 그러나 아니다. 결론은 다음으로 같다. "바로 여기에 러시아혁명에 최대 어려움마저도 있었다. 곧, 국제혁명으로부터 일어날 필요성, 때문이다." 레닌으로는 언제 이걸 말하고 썼는가. 니콜라이2세는 혁명을 그저 탄압하는 걸 두고, 빌헬름 2세와 협상을 벌이고 있는 나도 "극단화된" 정식들을 제출했던 1905년도 아니고, 1918년, 1919년, 그리고 그 다음 해들에도 일어난 일들이었었다. 다음으로는 레닌으로는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서도 과거를 회상하면서 했던 이야기도 있었다. 


"러시아에 트로츠키도 있었을 때, 국제적인 세계혁명에 대한 지원 없이는 무산계급혁명들로부터 승리할 수 없다는 건 우리에게는 명백해진다. 혁명 이전에도, 그리고 심지어 그 뒤로도, 우리들에게는 이렇게도 생각했었다. 다른 나라들, 곧 더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혁명마저도 즉각적으로, 또는 최소한 아주 빨리 일어나지도 않기에 우리는 괴멸할 수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확신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슨 상황에서든지, 무슨 일마저 일어나든지 간에, 소비에트 체제를 수호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건 우리에게는 단지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제혁명들을 위해서도, 최선들을 다했었다. 그건 우리에게는 단지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국제혁명들을 위해서도 활동하고 있다는 걸 매우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10월혁명들 이전에도, 이러한 확신들을 거듭 표명해왔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말해서도 이건 옳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건들로부터 우리도 예상했듯이 그저 일직선들을 따라서만 전개되지는 않았었다. 코민테른 3차대회 회의록, 러시아어판. 


이와 같이 1921년부터 계속해서도 사태는 나나 레닌이나 1905년뿐만 아니라 1917-1919년 사이에서도, 예상됐듯이, 일직선을 따라서만 전개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노동자들에 국가나 지배계급 세게 사이에서는 화해할 수도 없는 모순이라는 선들을 따라서만 사태는 전개됐었다. 결국 둘 가운데 하나는 멸망할 수밖에는 없다. 노동자들에 국가로는 오직 서구에서는 무산계급혁명들로부터도, 승리해서 발전할 때만, 이러한 파멸에 위험에서도 벗어나서 군사적·경제적으로도 수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에 대한 내 입장으로는, 레닌에 입장이라는 두 가지 입장들을 발명해내고자 했던 시도로는 이론적 꾀죄죄함들에 대한 극치다. 최소한 레닌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는, 그를 중상모략하지는 말라. 우리에게는 스탈린주의라는 상한 옥수수죽마저 먹이지는 말라. 그러나 타락은 여기서도 그치지는 않는다. 레닌으로는 세계무산계급들에 대한 "단순한" 본질적으로 개량주의적이고 퍼셀적인 원조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트로츠키는 국가원조들이나, 곧 혁명적인원조들만을 "과도하게 요구했다"는 이야기를 발명하고 나서부터는, 라데크는 계속해서 말한다. 


"경험은 이로부터도, 이에대해서도, 역시나 레닌마저 옳았다는 거 잘 보여줬었다. 유럽에 무산계급들에게는 아직까지도 권력들을 장악할 능력조차도 없었지만, 간섭기 가운데에서는 세계적인지배계급들로부터는 우리들에게마저도, 실제적인 힘들을 쏟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을 만큼만 충분하게 강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그들은 우리들에게 소비에트 권력들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저 도와주기만 했었다. 자본주의 세계들 자체라는, 적대관계와 함께, 노동운동들에 대한 두려움들이야말로, 개입으로부터 끝날 때까지도, 8년 동안이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켜 준 중요한 힘들이었다. 


이 구절로는, 현재에 문필가들에게도 저작들로부터 비교할 때는, 비록 독창성으로부터는 번뜩이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역사적 시대착오나 정치적인 혼동, 그리고 원칙 상으로도, 중대한 오류들로 뒤범벅됐다는 사실로는 주목해 볼 만한 가치마저도 있다. 라데크에 말로 따라본다면, 레닌으로는 1905년에 그에 소책자 <두 가지 전술>에서도, 라데크는 레닌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저작이다. 에서도 1917년 이후에도 국가와 계급들 간에 세력관계로는 우리들에 대한 대규모 군사개입들을 할 수 있다는 걸 오랫동안 배제하는 거라고 그저 예언했다는 결론들에도 도출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도, 트로츠키는 1905년에 제국주의 전쟁 이후에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될 상황들ㄹ로부터도 예측하지도 못했고, 강대한 호엔촐레른가들에 군사력, 및 매우 강력한 합스부르카들에 군사력이나, 막강한 파리증권거래소 등으로 같은 당시에 현실만을 염두해두었다는거다. 이건 말로도, 참으로도, 어처구니조차없는 시대착오이고, 더욱이 그건 자체로도 우스꽝스러운, 내적모순들 때문에, 더욱 복잡하게 된다. 왜냐하면, 라데크로 따른다면, 내 주요한 오류는 "1905년에 발전수준들에서" 무산계급독재라는 전망들을 제시했따는 사실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둘째로, 오류로는 명백해진다. 나는 1905년 혁명전야들에서도 나도 제시했던 무산계급독재라는 전망들을, 1917년 이후에야 비로소 생겨났던 국제상황들로부터도 비춰 생각해보지도 못했다는거다. 스탈린에 일상적인 주중들도 이 모양들이라고 해도 우리는 전혀 놀랍지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1928년뿐만 아니라, 1917년ㅇ에 그에 따른 "발전수준"들도 충분하게 잘ㄹ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라데크는 어떻게 이런 패거리에 끼게만 됐던가. 


그러나 이조차도 최악에 상태로는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최악이란 라데크로부터, 마르크스주의와 기회주의, 혁명적 입장들이나 평화주의적 입장들을 구분하는 경게선마저도 넘어버렸다는 사실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참으로도 전쟁반대투쟁들에 대한 문제를, 곧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도, 전쟁들을 그저 회피할 수 있거나, 근절할 수 있는지를, 다루던 문제라고 밖에는 할 수조차도 없었다. 곧,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무산계급들로부터 압력들로는던가, 아니면 지배계급들로부터 타도하고자 하기 위한 내전들이던가. 라데크는 무산계급들에 정치에 대한 근본문제를 마저도 부지불식간에도 우리 사이에 논쟁으로 끌어들였다. 라데크는 나는 농민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들에 대한 무산계급들에 압력들 마저도 그저 '무시'하고 있고, 무산계급들에 대한 혁명만을 배타적으로 고려해왔다고도 말하고 싶던걸까. 그는 텔만이나, 세마르, 또는, 몽무소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그러한 어처구니도 없던 일들을 옹호하리라고는 거의 대부분마저도 생각할 수조차도 없었다. 코민테른 3차 대회에서는 당시에 극좌파들 지노비예프, 탈하이머, 텔만, 벨라쿤 등은 소련을 구하고자 서구에서 폭동주의 전술들을 취할 거라고 심각하게 주장했었다. 나는 레닌으로부터 함께 그들에게 할 수 있는 한 그저 평이하게나마 다음으로 같은 사실들도 잘 설명해줬었다. 그들에게는, 우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에 원조로는, 우리를 위해서만 즉흥적으로 혁명적인 모험들을 감행하기보다는,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방법들로부터 자신들에 위치를 더욱 강홯하고, 권력들을 장악하기 위해서도, 자신들을 위해서만 준비하고자 하는 일이라는 사실들로부터 말이다. 당시에도,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라데크는 레닌이나 트로츠키 편도 아니고, 지노비예프와 부하린 편에 서고야 말았었다. 하지만 라데크는 나와 레닌에 대한 주장들에 본질로는 바로 극좌파들로부터 취했던 불합리하게 '극단화된 정식'들을 준엄하게, 공격한다는 걸 회상하고 있음을, 어쨌든 3차 대회에서, 회의록에서도, 그저 회상할 수만 있었을 뿐이었다는 건 틀림없었다. 그들에게는 당에 대한 강화와 무산계급들에 대한 압력으로는 국내적·국제적 관계들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설명하고 나서는, 우리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작 '압력'이란 권력장악들을 위한 혁명적 투쟁에 하나로 기능할 뿐들이고, 이 투쟁들에 발전들로부터 완전하게 종속된다는 걸 덧붙였었다. 그래서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레닌으로는 제3차 대회는 끝날 무렵에 대의원들에 대한 대규모 친목회의들에서도 수동적·대기주의적 경향들을 직접적으로도 반박하고 대략적으로도 다음으로 같은 교훈들로만 끝맺는 일장연설들만 해왔던거다. 곧, 모함하지는 말라. 


그러나 친애하는 동지들이여, 지체하지도 말라. 왜냐하면 '압력'만으로는 우리는 오래 버틸 수 조차도 없으니까는 말이다. 라데크는 전후에 유럽 무산계급들로부터 권력들을 장악할 수는 없었지만, 지배계급들로부터는 우리를 분쇄한다는 걸 막아줬다는 사실로부터는 그저 언급하고만 있었다. 나, 역시나 이에 대해서는 직접 이야기했던 적들도 여러번이나 있었왔었다. 그렇지만, 유럽에 무산계급들로는 우리들에 파멸마저도 막을 수 있었던 건 오직 무산계급들에 대한 압력이나 제국주의 전쟁들로부터도 매우 심각한 결과들로부터 그로 인해서, 오히려 악화된 국제적인 적대관계와도 딱 맞아떨어졌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 어느게 더욱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다. 곧, 제국주의 진영 내에서 투쟁인가, 경제적붕괴인가, 아니면 무산계급들에 대한 압력인가라는 방식들로도 함부로 문제를 제기할 수조차도 없겠다. 그렇다고 문제를 그런 식으로는 처박아 둘 수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평화요구압력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건, 모든 '압력'들에도 불구하고, 일어났던 제국주의 전쟁들도 너무도 명백하게도 입증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비에트공화국 초기에 결정적인 시기들에서도, 오직 당시에 유럽에 대한 무산계급에게도 압력행사들이라는 문제들 분만 아니라, 권력장악들을 위한 투쟁들, 또한 이러한 투쟁들로는 대개 내전들에 형태를 취했다는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마저도 특히나 중요하다. 1905으로는 유럽에서는 전쟁도, 경제적붕괴도 없었고, 자본주의와 군국주의는 완전하게도 피로만 굶주리고 있었다. 당시에도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압력'으로는 빌헬름 2세나 플란츠 요제프는 군대를 이끌고 폴란드 왕국들로부터도 더욱 진군하거나, 더 넓게는 그저 차르를 도와주러 오던 걸 절대로 막을 수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018년에도 독일 무산계급들에 대한 압력으로는 호엔촐레른가에 대한 지역들이나 우크라이나를 점령한다는 걸 저지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에게는 모스크바까지도 진군하지도 못했던 건 오직 군사력으로도 불충분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리고 왜 우리에게는 브레스트강화를 체결해야만 했었겠는가. 얼마나 쉽게 어제에 일마저도 잊어버리든지. 레닌으로는 무산계급들에 대한 '압력'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고, 오히려 독일혁명들 없이는 우리는 멸망하고 말 거라는 걸 거듭해서 주장해왔었다. 휴지기는 길기는 했지만 이건 본질적으로도 옳았었다. 환상들을 버리자. 우리는 기약 없는 유예상태들에 있을 뿐이었다. 전과 같이 마찬가지로도, 우리는 "잠시도 숨 돌릴 여유"라는 조건들에서만 헤맸고, 존속했을 뿐이었다. 


무산계급들로는 아직도 권력들을 장악하기로는 역부족이지만 지배계급들로부터도 전쟁을 위해서만 권력들을 이용한다는 건 막아볼 수는 있는, 그러한 상태로는 불안정한 계급균형상태들에 대한 고차원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균형들로부터 그리 오래 지속될 수는 없을 때는, 우린느 그걸 불안정하다고만 말한다. 그러나 그건 어느 쪽으로든지, 기울 수밖에는 없겠다. 무산계급들로부터 권력들을 쟁취할 수 있는가, 아니면, 지배계급들로부터 일련에 탄압조치들로부터도 활동들에 대한 자유들, 특히나 전쟁이나 평화들에 대한 문제들에서도, 활동들에 대한 자유들로부터 회복하기에도 충분할만큼 혁명적인 압력들을 약화하는가일 뿐이다. 
   

지배계급국가들에 대한 무산계급들에 압력으로는, 영원하게 증대하는 요인들로부터, 또한 개입들을 저지하는 보증서로도 묘사할 수 있다는 걸 두고 개량주의자들뿐이기 때문이다. 세계지배계급들에 대한 '중립화'들에 기초해서도 일국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스탈린에 이론들에 실체로는, 바롤 그러한 인식들에서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부엉이는 황혼에 무렵에서야 날아다닌다는 말로부터 마찬가지로도, 무산계급들에 대한 압력으로부터 지배계급들을 중립화할 수 있다는 스탈린에 이론들 역시나, 그걸 만들어냈던 조건들로부터는 소멸해내기 시작할 때에만 비로소 생겨날 수만 있었다. 그릇되게 해석한 전후에 대한 경험들로부터도 유럽에 무산계급들에 대한 혁명들 없이는 그걸 일반적으로만 '지지'로 대체함으로, 그저 살아남을 수만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만적인 희망들로부터만 연결되던 바로 그 시기들에, 국제상황들은 급격한 변화들마저도 경험하고는 말았었다. 무산계급들에 패배는 자본주의들에 대한 안정화로 귀결됐다. 전후자본주의 위기마저도 회복됐다. 제국주의적 살육들에 공포를 차마 맛보지도 못한 새로운 세대들도 자라났다. 그 결과로, 이제는 지배계급들도 5-8년 전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여유롭게, 전쟁기구를 처분하고 있었다.

노동계급, 대중들로부터도 좌익 쪽으로만 급진화하면서부터는 지배계급 국가들에 대한 그들에 압력마저도 다시 한 번 증대하리라는 건 의문에 여지도 없다. 그러나 이건 그저 양날에 칼만 같다. 노동계급들로부터 가하는 점증하는 위협들에서도, 훗날 나중단계들에서는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자신들만이 집주인이라는 걸 보여줄 뿐이고, 전염병에 중심지던 소비에트공화국들을 파괴하고자 결정적인 조치들을 취하도록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들에 대하 압력들이 아니라 오직 권력쟁취를 위한 혁명적인 투쟁들만이 전쟁에도 반대할 수 있는, 투쟁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무산계급들에 투쟁들로부터는, '평화주의적'인 효과들만으로는, 개량주의적인 효과나 마찬가지로도, 그저 권력쟁취를 위한 이기적이기만 하고, 혁명적인 투쟁들만에 부산물들일 뿐이다. 그건 그저 상대적인 힘들에만 불과하므로, 보다시피 너무나 쉽게 반대물로 전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건 지배계급들을 전쟁이란 길로도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라데크는 그토록 일면적으로도 강조하던, 노동운동들에 대한 지배계급적인 공포로는 모든 사회평화주의자들에 가장 핵심적인 헛된 소망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혁명들에 대한 '공포'들만으로는 무엇도 결정하지는 못한다. 결정할 수 있는 건 오직 혁명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레닌도 1905년에는 군주제 복고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보증으로는 무산계급들에 대한 압력만이 아니라 유럽에 대한 혁명적인 승리라고 말했던거고, 1918년에 자본주의들이란 재생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해왔던거다. 이게 유일하게 올바른 문제해결방법이기 때문이다.

비록 "잠시 숨 돌릴 여유"는 비록 길어지기는 했으나, 레닌ㅇ에 정식으로는 오늘날에도, 완전하게도 유효하다고 본다. 나, 역시나, 이런 문제를 동일한 방식으로도 정식화했었다. 나는 1906년에 <평가와 전망>에서도 다음으로 같이 썼었다. 



무산계급들에 반란들에 대한 바로 이러한 공포들 때문에, 엄청난 예산에 가운데서, 군사비를 승인하면서까지도, 지배계급들에 정당들은 하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도, 평화를 위한 엄숙한 선언문들을 발표해왔고, 국제사법재판소나 심지어는 유럽합중국과도 같은 걸 그저 생각할 수밖에는 없다는거다. 물론, 이러한 졸렬한 선언문들은 결코, 절대로도 국가 간에 적대관계나 군사충돌만으로는 일소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6차 대히에서 기본적 오류로는, 바로 스탈린이나 부하린에 졸렬한 평화주의적·민족적·개량주의적인 전망만을 구하고자 반전투쟁들을 권력투쟁들로부터 분리하게해왔고, 전쟁위험들에 반대하는 혁명기술적인 처방마저도 추구했다는 사실들에 있었다. 6차대회들에 고취자들, 곧 일국사회주의에 가공할 건설자들, 본질적으로는, 겁만 질린 평화주의자들은 '압력' 강화책들로부터도, 지배계급들에 대한 '중립화'를 영속화하고자 시도만 해왔었다. 그러나 이제까지도 일련들에 나라들에서조차도, 자신들에 지도로는 혁명들에 대한 패배만을 초래하고 있고, 무산계급들에 국제적인 전위를 휘퇴하게했다는 건, 그들도 알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혁명에 대한 문제들이나, 전쟁에 대한 문제를, 불가분하게 결합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소위 "극단화된 정식"들을 방기하려고만 해왔다는거다. 그들은 반전 투쟁들을 자기완결적 임무로도 만들어버렸었다. 각국에 당들은 결정적인 시간들을 넘어서까지도 늦잠을 자지도 못하게하도록, 그들은 전쟁위험들에서도 영속적이고, 임박해있었고, 당면한거로만 선언했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전쟁준비를 위한 걸로만 생각해왔었다. 스탈린주의자들에게는, 이제 더는 전쟁이란 지배계급들에 체제이라는 수단들만이 아니라, 지배계급들에 체제로부터 전쟁이란 수단들로 돼 버렸었다. 그 결괄로 인해서, 코민테른들에 반전투쟁들은 의례적 정식이라는 체계로도 변질돼, 무슨 경우에나 자동적으로만 반복됐었고, 효력을 완전하게 잃고는 온데간데없이도 증발해버렸었다. 스탈린에 민족사회주의라는 코민테른들을 지배계급들에 대한 보조적인 '압력수단'들로 전화하려고만 하고 있다. 라데크는 그에게 성급하고, 소홀하고, 피상적인 비판들로부터 도와주고 있는 건, 마르크스주의로부터도 아니고, 바로 이러한 경향들이었다는 걸. 그는 나침반을 잃어버렸고, 그를 전혀 다른 해안으로 데려갈지도 모르는 이상한 해류로만 휘말려버렸다.



1928년 10월 알마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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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중권력들에 핵심인가. 우리는 이 질문들을 잘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저술들에서도 이 문제는 한 번도 해명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중권력으로는 사회위기에 뚜렷한 특징들이고,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는 이 혁명들에서만 나타난 특징으로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에는 적대계급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권력마저도 없는 계급들은 권력들을 지닌 계급들에 지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변형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두 개 이상들에 권력들마저도 존재하게 된다는 건 아니다. 지배계급들이나 피지배계급들 사이에서도 관계는 정치구조라는 성격을 직접적으로 규정한다. 단일권력으로는 정치안정들에도 필요조건들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으로는 자신들에 경제적·정치적 구조를 사회전체에 유일한 선택으로 강요한다는데 성공할 경우로는 단일권력으로는 유지된다. 


호엔촐레른 왕조들에 형태로든 공화국 형태로든 독일에 대지주계급들인 융커들이나 자본가계급들로는 동시에 독일사회를 지배해왔다. 이 두 지배계급들에게는 서로 날카롭게 갈등들을 일으킨 경우마저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이건 이중권력들은 아니다. 이들에 사회기반들은 같아서 이들 사이에 갈등들은 국가기구를 분열하게 할 위험마저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중권력으로는 계급갈등들로부터도 화해할 수 없을 때만 등장한다. 따라서 혁명기에만 등장할 수 있고, 혁명에 대한 기본적인 구성요소들 가운데로 하나가 된다.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권력으로도 이동하면서 혁명은 정치적으로도 작동한다. 무력을 동반한 권력에 대한 타도로는 보통 짧은 시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그 어떠한 계급도 하룻밤 사이에는 심지어 하룻밤 혁명으로도 피지배계급에서 지배계급으로도 격상되지는 않는다. 이 계급은 혁명 이전부터 오래된 지배계급들에 대해 아주 독자적인 태도를 확립하고 있어야만 한다. 더욱이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독자적인 역할을 할 수도 없는 중간계급·계층에 대한 희망을 오로지 자기에게만 집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하도록 부름 받은 계급은 혁명 직전에 시기에도 비록 사회에 주인은 비록 아닐지라도 국가권력들에 대한 상당부분을 이미 장악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혁명은 준비된다. 물론 이때도 공식적인 국가기구로는 여전하게 오래된 지배계급 손 안에만 있겠다. 왜냐하면 모든 혁명에서 이중권력들에 대한 초기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이중권력들에 대한 유일한 형태로는 아니다. 따라서 자신들로부터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혁명으로부터 권력으로 올라선 새로운 계급들은 실제로는 벌써, 이미 낡아서 역사적으로도 유호기간들마저도 지난 계급들이기 때문이다. 이 결과로 이 계급들에게는 공식적으로도 권력들을 넘겨받기도 전에 벌써 새로운 과제를 해결할 능력마저도 상실한 계급들로 된다. 그런데도 이 계급들은 권력으로 떠밀려올라가는 그 순간마저도, 충분하게 성숙해서는 권력을 도모하는 적대계급으로도 마주하거나, 마주칠 때가 있겠다. 이때는 불안정한 이중권력들보다도, 더 불안한 권력으로 정치혁명으로부터 수립된다. 어쨌든, 이중권력이라는 '무정부상태'를 새로운 단계, 단계마다 극복하는 건 혁명 또는 반혁명들에 과제들이기 때문이다. 


- 세상에..계급에..자멸이라는 생각도 못했다..이말 지배계급들에 자멸상태라니..


일반적으로 이중권력으로는 두 적대계급들로부터 권력이 균형있게 양분될 수 있다는 건, 전제로 하기는 커녕, 배제한다. 이건 헌법으로도 인정되는 권력만이 아니라 혁명들로부터 조성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균형이 파괴되어 상부구조인 국가가 쪼개진 상황들이 바로 이중권력이다.

이때가 되면 두 적대계급은 시효가 지난 정부기구와 막 형성되고 있는 정부기구들, 곧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정부기구를 하나씩 꿰찬다. 그리고 이 정부기구들은 시시때때로 서로를 밀치고, 경쟁한다. 투쟁과정에서도 형성되는 계급들에 상호관계들에 따라서 각 계급들로부터 휘두르는 권력들에 양들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본선상으로도 이 상태로는 당연하게도, 안정적일 순 없겠다. 사회는 한 계급에게 권력들로부터 집중되어서 안정되기만을 원한다. 따라서 지배계급 또는 반지배계급들로부터도 사회는 이 목적들을 달성하려고만 애쓴다. 권력에 대한 양분상태로는 내전에 전조이다. 그러나 두 적대계급들은 이러한 극단에 대한 상황으로도 치닫기 전까지도, 특히나 제3세계에 개입들을 두려워할 때마다 이들은 상당기간 동안에도 이중권력들을 감내하고 심지어 승인하지는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체제는 폭발마저도 피할 수 없겠다. 왜냐하면 내전에서는 영토를 놓고 싸우기 때문에 이중권력이라는 모습들을 매우 두드러지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아성들로만 구축해왔던 두 세력들로는 나라에 영토만을 전부 차지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결과로부터는 두 적대세력들은 서로를 계속해서 침략하는 형태로만 이중권력들을 감내하다가 이 가운데 하나로부터 결정적으로 세를 굳힌다. 이를테면 17세기에 영국혁명도 있었다. 나라를 완전하게 파괴한 거대한 혁명이었다. 내전 형태로 이중권력들은 급격하게 서로에 대한 영역들을 침법하는 모습들을 명확하게 잘 보여준 사례였다. 심지어는 왕정은 귀족이나 주교 등에 특권계급 또는 이 계급들에 상층부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지배계급들에 계급이나 대지주들은 연합해서도 왕정에 도전했다. 지배계급들에 아성인 런던으로 지지하는 오로지 '장로의회'에서도 지배계급들에 정부였을 뿐이었다. 이 두 권력들 사이에서는 장기화된 투쟁들로는 마침내 공개적인 내전으로 해결된다. 그러나 두 권력으로 중심부였던 런던이나 옥스포드에서는 각각 자신들에 군대를 따로 조직한다. 이로써 이중권력들은 곧 영토를 차지한 내전에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내전 가운데에서는 영토경계선들은 수시로도 변하고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의회군은 승리하고 왕은 체포된다. 



그러나 이게 장로 지배계급들에 단일권력으로부터 수립될 조건으로도 형성된듯이 보인다. 그러나 왕에 대한 권력은 깨지기도 전에 의회군들은 스스로 독잦거인 정치세력으로도 변모한다. 이 군대는 자기 대오들에 대한 독립파, 곧 수공업자들이나, 농민 등 신앙심으로부터 투철하고, 결의에 찬 작은 지배계급들마저도 결집하게 만든다. 그리고 단순한 무장집단들도 아닌 치안방위군으로 변모하고, 부유한 큰지배계급들에도 맞서는 새로운 계급들에 대한 정치적인 대표로 되어서 사회에도 강력하게 개입한다. 이에 부응해서는 군대는 총사령부 위에서도 군림하는 새로운 국가기관, 곧 병사·선동가라 불리던 장교 대의원 위원회를 수립한다. 이렇게 해서 이중권력이라는 새로운 시기로부터 도래하게 된다. 한쪽에는 장로의회, 다른 한쪽에서는 독립파 군대로부터 자리를 잡고 계속 치고박고 대항하다가 이중권력들을 형성한다. 그리고 공개적인 투쟁들도 계속된다. 그러나 지배계급들에 군대는 크롬웰에 평민 '모범군'들을 무찌르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투쟁으로는 독립파에 칼로부터 장로의회는 도륙당하는 걸로 끝난다. 이제 장로의회는 잔당만 남아 유명무실해지고 크롬웰에 독재는 수립된다. 그러나 다시 혁명에 대한 극좌파인 수평파는 군대에 하부를 지휘해서는 군대와 귀족들에 대항하고, 평민 정권들을 수립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중권력들은 게속해서도 발전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작은 지배계급들에 대한 최하층이기만 하던 수평파는 권력을 잡기에는 역사적 조건마저도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크롬웰은 수평파를 제거하면서도 전혀 안정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정치적 균형들로부터 형성된다. 이 균형들로부터는 수년간 지속된다. 따라서 프랑스 대혁명에서는 제3신분들에 대한 상층부는 제헌의회에서는 핵심세력으로도 지탱되고, 작동되었다. 그러나 이 대의기구로는 왕에 대한 특권들을 전부 폐지하지도, 폐기하지도 않은 채로 권력을 장악한다. 이 시기로는 이중권력들에 쌍방들은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를테면 루이 16세는 바렌느로 도망하는 걸로 이중권력에 대한 상황으로는 끝으로 마무리됐고, 공화국으로는 결국 수립되면서부터는 이 상황으로는 공식적으로도 청산된다. 1791년에 제정된 제 일차 프랑스 헌법을 보자. 이 헌법은 다름아닌 입법부와 행정부라는 완전한 독립이라는 허구에 기초해서 탄생했었다. 



이건 어디서든 혁명인민들에게는 이중권력들 상황으로는 은폐했거나 은폐하려는 시도였었다. 

이때 이중권력이라는 한 축들은 혁명 인민들에 바스티유 감옥 점령 이후 국민의회를 확고하게도 장악한 지배계급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으로는 성직자, 관료, 군대에 상층부에서도 여전하게 의존하면서도, 반동적인 외국들에 혁명 개입들을 희망하기만 한 낡은 왕정들이었다. 이 자기모순적인 체제는 내부에 파괴라는 싹들을 불가피하게도 가지고 있었다. 이 모순으로는 유럽에 반동강대국들로부터도 프랑스 혁명에도 개입해서는 지배계급들을 제거하던가 아니면 왕이나 왕정들로부터도 단두대에 이슬로 사라짐으로부터 해결될 수 있었다. 결국 혁명파리와 반동 코블레츠는 힘을 겨루여야만 했었다. 그런데도 전쟁이나 단두대 전에 코뮌에 인민자취위원회들은 파리에 혁명 무대에도 등장한다. 제3신분 가운데에서도 도시 최하층민들에 지지를 받았던 코뮌으로는 점점 대담해져서는 프랑스 지배계급들에 대한 공식 대표들로부터도 권력들을 다투었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이중권력들로부터 형성됐다. 이중권력들로부터 증후로는 큰지배계급들이나 중간지배계급들이나 행정부와 자치도시들에서도 권력들을 확고하게 장악한 1790년대에도 이미 나타났었다. 가발이나 비단 승마바지에 유산계급들은 나라에 운명을 독단하고만 있던 정치무대에서도 사회에 밑바닥들이던 평민들도 등장해서는 정치에도 개입했었다. 이들에 시도는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얼마나 지독한 비방들마저 받았는가. 교양 있는 지배계급들에게 짓밟혀왔던 사회에 밑바닥들로부터 꿈틀거리고, 생명력도 있는 존재임을 증명했다. 사람들에 머리는 딱딱한 땅을 비집고 올라와서는 굳은살로부터 배긴 손을 뻗으면서 쉰 목소리로나마 용감하게도 고함을 질렀다. 혁명에 사생아던 파리에 구역들에는 자기들에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지배계급들은 단박에도 이들에 모습들을 보아왔다. 이들을 모르는 체 할 수도 없어졌다. 구역은 다시 작은 구역들로 재편됐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해서 법에 대한 경계선마저도 무너뜨리고서는 아래로부터 신선한 피들을 수혈 받았다. 법들을 무시해왔고, 아무런 권리마저도 갖지도 못하고 빈곤에만 허덕이던 빈민들에게는 정치활동들에 대한 문들을 열어주었다. 봉건소유제를 방어하는 지배계급들에 법에 대항해서도 농민들은 봉기를 일으켰고, 지방에 자치도시들에서는 이들을 옹호했었다. 이렇게 해서 이등 국민들 밑에 있던 삼등 국민들마저도 들고 일어선다. 파리에 작은 구역들에서는 처음에는 코뮌들로부터 대치했다. 당시 코뮌으로는 여전하게 품위 있는 지배계급들로부터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1792년 8월 10일, 소구민들도 대담하게 공격해서는 코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혁명코뮌들은 입법의회 그리고 이후 국민공회에 저항했다. 입법의회와 공민으회는 혁명들로부터 제기한 문제들이나 속도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다만 사건들만 기록할 뿐이었다. 파리에 구역들 한가운데에서도 일어나 가장 후진적이던 농촌마을들에 지지를 받은 새로운 계급들에 활기, 대담성, 의견에 완전한 일치마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구민들은 코뮌을 장악하자 코뮌은 새로운 봉기들로부터 국민공회를 장악했다. 혁명에 매단계마다 대항권력들에게는 극명하게도 구분된 이중권력으로부터도 등장해서는 우익권력들은 방어투쟁들을 좌익권력은 공세투쟁들로부터 강력한 단일권력들을 확립하고자 애썼다. 혁명이나 반혁명들에서도 독재체제 수립들을 위한 요구로는 이중권력들에 참을 수 없는 모순에서도 나온다. 이중권력들은 내전들로부터도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도 이행한다. 권력에 대한 새로운 게급 및 계층들에게 넘어가는 혁명에 거대한 단계들은 각 단계에서도 조응하는 대의기관들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대의기관들은 뒤늦은 그림자처럼 혁명에 폭풍 뒤에서만 천천히, 스물스물 뒷따라올 뿐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도 하층민들에 혁명독재는 국민공회라는 독재와도 연합한다. 그러나 무슨 국민공회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테러로 이 대의기구를 장악했었던 지롱드 파는 제거됐다. 대신 새로운 사회세력들에 지배를 위해서 국민공회는 축소됐고 개조됐다. 이렇게 해서 이중권력들에 단계들로부터도 프랑스 혁명은 4년을 경과하면서 절정에 도달했다가 테르미도르 9일에 반도 이후로는 다시금 이중권력들에 단계들로부터 하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승단계와 똑같이 매하강단계마다 먼저 내전들로부터 벌어진다. 이 방식들로부터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세력 균형들을 찾는다. 



라스푸틴에 관료들로부터도 싸우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러시아 지배계급들은 전쟁 가운데에서도 자신들에 정치적 입지를 엄청나게 강화해갔다. 이들은 차르체제에서도 패배를 활용하는 한편으로도, 도시와 농촌에 단체들이나, 군산위원회 등으로부터도, 거대한 권력들을 장악했다. 지배계급들은 국가에 대한 자원들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도 있었으므로, 그자체로도 유사정부였다. 차르에 장관들은 전쟁 가운데서도 "로보프 공으로부터도 군대에 보급품, 식량, 의약품 등을 공급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병사 이발소까지도 운영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1915년에 크리보셰인 장관은 이렇게도 말했다. "이 상태를 중지시키거나 그에게 권력을 전부 넘기거나 둘 중에 하나밖에는 없겠다." 그로부터 일년 반이 지났을 때 르보프는 '권력들을 전부' 접수하게 되리라는 걸 그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었다. 다만 권력으로는 차르만이 아니라 케렌스키, 체이드제, 수하노프로부터도 제공됐을 뿐이었다. 그러나 르보프는 권력을 잡은 지 이틀만에 새로운 이중권력으로부터도 성립됐다. 어제는 분명 자유주의자들에 반정부였으나, 오늘은 공식적으로도 합법성을 부여받는 임시정부들로부터도 한 축을 이루었었다. 그리고 공인 받지는 않았으나 훨씬 더 실세로는, 노동대중들로부터 정부 소비에트는 또 한 축을 이루었었다. 이 순간부터도 러시아혁명은 세계사적인 의의를 지닌 사건으로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이중권력들에 특수성들은 과연 무엇인가. 17세기와 18세기에 혁명들에서도 이중권력들은 적대세력들에게 일시적으로도 강요된 투쟁들에 자연스러운 단계였었다. 여기서 각 세력들은 자신들에 단일권력들로부터 이중권력으로 대체하려 했었다. 그런데도 1917년 혁명에서는 공식 민주주의 세력들에 의식적으로도 이중권력들을 수립해놓고는, 권력을 장하는 건 온 힘을 다해 피했었다. 그저 언뜻 보기에는 적대계급들에 권력장악 투쟁들만이 아니라 한 계급들에 대한 자발적인 '양보'로만 이중권력으로부터는 성립하듯이 보였었다. 그러나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들로는 스스로 권력들에서도 물러남으로부터도 이중권력들이라는 모순들을  청산하려고만 했었다. 우리는 표현한 바로는 2월 혁명들에 역설들로는 바로 이 현상들을 두고 한말들이었었다. 



러시아에 경우로는 지배계급들은 왕정들에 대해 보인 태도 면에서도 1848년 독일로도 비슷했다. 그러나 완전하게 같지는 않았다. 독일 지배계급들은 합의로부터도 왕정이나 권력들을 나누어 가지려고 진지하게 노력했다. 이로부터도 권력을 완전하게도 장악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완전하게도 왕정에 넘겨주지도 못했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렇게도 말했다. "프로이센 지배계급은 명목상으로만 권력들을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옛정부세력들로부터도 아무런 조건도 없이도 복종해서는 자신들에 전능들을 그저 충성스럽게만 따르리라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1917년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들은 봉기에 순간부터로 권력들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지배계급들로부터도 나누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기구 전부를 통째로 넘기려고도 했다. 20세ㅣ에 첫 25년에 러시아에서도 공식 민주주의 세력으로는 19세기 독일에 대한 자유지배계급들보다도 훨씬 더 완벽하게도 정치적으로도 스스로를 해체했다. 그리고 이 현상으로는 역사적인 법칙들에 대해서도 전적으로도 부합한다. 같은 시기로는 노동계급들에 급성장들이나 동전들에 양면들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롬웰에 지지층들이던 수공업자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에 지지층이던 하층민처럼 이제는 러시아 노동계급들은 철두철미하게도 혁명들을 수행할 지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관찰해보면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이중권력이라는 구도로는 권력에 대한 실세에 그림자에 그저 지나지 않았고. 노동계급만이 유일하게 새로운 권력들을 오히려 주장할 수 있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을 불신하면서까지도 이들에게만 의존했던 타협주의자들은 왕이나 예언자라는 이중장부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는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이나 민주주의자들에 이중권력들로는 지배계급들이나 노동계급들에 참된 이중권력들을 숨기는 동시에도 반영해왔었다. 이로부터 몇 달 뒤로는 볼셰비키들도 나타나서는, 타협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소비에트는 선두에 설 때로부터, 숨겨져 있던 이러한 참된 이중권력들로부터도 표면으로도 드러났고, 10월 혁명에 전조로 된다. 이때까지는 혁명으로는 정치적인 반사된 세계에만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회주의 지식인들에 변명으로도 굴절되기까지 했었던 이중권력들은 계급투쟁에 대한 단계만이 아니라 계급투쟁들을 억제하는 원칙마저도 됐었다. 이중권력들에 대한 모든 이론적 논의로는 중심이 된 이유로는 바로 여기에도 있었다. 모든 사물들은 나름대로 소용마저도 있어왔다. 2월 이중권력들에 대한 반사경 같은 성격 때문에도 두 채제라는 투쟁들로부터는 완전하게도 모습들을 드러낸 이중권력들로부터도 같은 시기로는 더 잘 이해된다. 햇빛으로부터도 반사되서는 흐릿하게 비치는 달빛으로부터도 햇빛들에 대한 중요한 결론들을 이끌어내는거와도 같기 때문이다. 



17세기와 18세기 혁명에 주역이었던 도시대중들에 비해서, 러시아 노동계급들은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성숙했었다. 이건 러시아혁명이 지녔던 혁명에 대한 근본적인 특수성이었다. 이 결과로는 반 정도에 허깨비만 같던 이중권력들에 역설들마저도 나왔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립된 참된 이중권력들에 상황으로는 지배계급들에게 오히려 불리하게까지 전개됐었다. 문제는 의외로 간단했었다. 왜냐하면 지배계급들은 옛 국가기구를 실제로 장악해서는 자기들에 목적들에만 맞게 약간만 개조하면서도 소비에트를 그저 무용지물로만 만들든가, 아니면 소비에트로부터 새로운 국가에 대한 기초를 형성해서는 옛 국가기구뿐만 아니라, 여기에 봉사했었던 계급들에 대한 지배를 청산하든가, 둘 중에 하나기만 했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으로는 전자에 해결책만을 찾았었고, 볼셰비키는 후자에 해결책만을 찾았었다. 프랑스에 혁명가 마라는 이렇게도 말했다. "과거에 피억압 계급들은 자신들로부터도 시작했었던 혁명을 끝까지도 수행할 지식, 기술, 지도력들마저도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러시아혁명에서는 비로소 피억압계급들이던 노동계급들로부터도 이 세 가지 모두로도, 이 세 박자 모두로도, 골고루 갖추고 있어왔다." 이 때문에 볼셰비키는 승리했다.



러시아혁명으로부터도 승리한지 연 일년 만에도 같은 상황들은 독일에서도 반복됐다. 그러나 이때에 계급 역관계는 러시아와도 달랐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지배계급들에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대신 소비에트를 청산하는 쪽으로 혁명을 이끌었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소비에트 독재로도 혁명을 이끌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승리했다. 독일에 힐퍼딩, 카우츠키, 오스트리아에 막스 아들러 등은 소비에트 체제를 그저 민주주의로만 '결합해서는' 노동자 소비에트를 헌법에만 포함하기를 제안했었다. 이 제안들로부터도 그저 실현됐다면 잠재적 또는 실질적 내전들은 더욱 국가적인 정치체제로만, 구성부분들로만 됐을거다. 이거보다 더 신기한 유토피아는 상상하기조차도 힘들거다. 그러니 이러한 제안들로는 1848년 혁명에서도 뷔르템베르크 민주주의자들은 공작들로부터 국가를 대표하는 공화국들을 원했다는 걸 독일로부터 이어진 전통에서는 그저 유일한 변명거리만을 찾을 수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국가이론들에도 의거하면, 정부는 지배계급들에 집행위원회다. 그렇다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논의대상마저도 되지 못했던 이중권력이라는 이 현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도 과연 모순되는가. 이걸 달리 표현하면 이런 질문으로도 된다. '공급이나 수요로부터도 가격등락으로는 과연 노동가치론으로도 모순되는가. 이를테면 어미는 새끼를 보호하는 자기희생이라는 행위로는 과연 생존투쟁이라는 이론들을 반박하는가. 아니다. 그렇지도 않다. 이 현상들로부터는 같은 법칙들로부터는 좀더 복잡하게만 결합됐을 뿐이다. 국가는 그저 지배계급들에 조직일 뿐이다. 혁명으로는 그저 지배계급들을 타도할 뿐이다. 그렇다면 한 계급들로부터는 다른 계급들로부터 권력이동으로도 반드시 자기모순적인 국가상태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중권력들을 성립하게할 수밖에는 없겠다. 계급역관계로는 선험적으로도 계산할 수 있는 수학적인 양으로는 아니기 때문이다. 옛 체제로는 타도되어서 균형을 잃어버리면 투쟁들로부터만 새로운 역관계는 성립되고, 확립할 수 있다. 이게 바로 혁명이다. 



이중권력들에 대한 이론적 탐구로는 1917년 사건들로부터도, 우리로부터도, 반드시 멀어지게만 만들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탐구로부터는 분명하게 우리는 당시에도 사건들에 핵심에 도달할 수 있었고, 또한 도달했고, 반드시 도달한다. 정당들이나 계급들에 극적인 투쟁들로는 바로 이중권력들에 문제를 축으로 전개됐다. 오직 이론적으로도 최고조에 이르러서만 이 현상들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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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무산계급들에 사활로 걸린 문제들.



러시아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사슬에서도 가장 약한 고리였다. 극단적 후진성 때문이었다. 지금에 위기에서도 독일 자본주의는 정반대 이유로, 곧 곤경에 처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가장 약한 고리임이 드러나고 있다. 독일의 생산력이 점점 더 발전하고 그 역동성이 높아질수록, 독일에서 생산력은 유럽에 국가체계 속에서도, 질식사하고 있다. 그 체계는 가난한 지방동물원들에 있는 축사들에 체계와도 비슷하다. 사건에 대한 국면에서 바뀔 때마다 독일 자본주의는 과거에도 전쟁으로만 해결하려 했던 바로 그런 문제들에도 부딪쳤다. 호엔촐레른 정부 시절에는 독일 지배계급으로는 '유럽에 판을 짤'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브뤼닝·쿠르티우스 시절에는 기껏해야 오스트리아에 관세동맹들을 체결하려고만 했다. 독일 지배계급들에 문제·잠재력·전망들로는 그렇게 한심한 수준으로까지도 떨어졌다는거다. 그러나 그 관세동맹조차도 실패했었다. 동화에 나오는 마녀에 집처럼 유럽에 전체 국가체계는 암탉에 두 다리 위로 세워져있었다. 몇백만 명에 오스트리아인들은 독일로부터 단결하게되면, 위대하고, 건강한, 프랑스 패권마저도 붕괴할 위험조차도 있다. 



유럽 전체, 특히나 독일은 자본주의 길로 가면 결코 전진할 수조차도 없다. 현재에 위기로는 노동자들에 시체들 위에서도 자본주의에 힘들은 저절로 상호작용해서 일시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단계에서는 온갖 모순들로부터 훨씬 첨예하고 집중적인 형태로 되살아나는 일들을 결코 피할 수조차도 없을거다. 세계경제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들은 줄어들 수밖에는 없다. 이미 유럽에 이마에는 도스안, 영안, 미국 대통령·후버에 독일 전쟁배상금 지급정지 같은 미국에 딱지들로부터 들러붙어서는 결코 떨어지지도 않고 있다. 유럽은 철저하게도 미국에 배급식량들에만 의조하는 처지다. 자본주의에 쇠퇴로는 사회적·문화적 해체를 낳고 있다. 그래서 정상적 계급분화들에 대한 길들은 막혀 있었고, 중간계급들은 감소하면서도 무산계급들로부터 증가하는 과정들도 중단돼 있었다. 위기는 길어질수록 새로운지배계급들에게는 빈곤해지고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은 한심한 룸펜무산계급들로 전락할거다. 바로 이런 위협들은 매우 첨예한 형태로 선진·자본주의 국가인 독일에 목을 먼저 조르고 있다.



부패하고 있는 자본주의 유럽에서 가장 썩어빠진 부분들은 사민당관료집단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적 여정들을 시작했을 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깃발을 분명 들고 있었다. 당시로는 그들에 목표는 지배계급들에 대한 지배를 전복하는거였다. 그러나 보라 강력하게 성장하는 자본주의는 그들을 사로잡고 개같이 질질 끌고 다녔다.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에서도 그들은 혁명들을배신했었다. 처음에는 행동으로 그랬었고, 나중에는 말로도 그랬었다. 카우츠키는 오랫동안 혁명이라는 말들을 옹호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혁명에 개혁주의를 부속물쯤으로 만들어버렸다. 반대로 베른슈타인은 혁명포기를 요구했었다. 자본주의에는 위기마저도 없었고, 전쟁마저도 없는 평화적 발전들에 대한 시대로만 접어들었다는 이유에서였었다. 정말 대단한 예언이었다. 언뜻 보면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 사이에서는 해소할 수 조차도 없는 차이는 있는듯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혁주의라는 외쪽 신발이나 오른쪽 신발이라는 완벽한 대칭적인 보완물이었을 뿐이다. 그러다 전쟁은 결국 터지고야말았다. 사민당은 미래에 대한 번영이라는 이름으로도 전쟁들을 지지해왔고, 그러나 번영만이 아니라 쇠퇴는 벌써 시작됐었다. 이제 사민당에 과제는 자본주의 결함에서도 혁명에 대한 필요성들을 추론하는거에도, 개혁들을 이용해서라도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혁을 희생해서라도 지배계급들에게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건 새로운 과제였다. 그러나 이조차도 변질에 마지막 단계는 아니었다. 자본주의를 뒤흔들고 있는 현재에 위기 때문에도 사민당은 오랜 경제·정치적인 투쟁 끝에 얻은 성과들을 희생하게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현재 독일 노동자들은 그들에 아버지·할어버지·증조할아버지 대에 생활수준으로까지 후퇴하게 됐다. 개혁주의는 스스로 쟁취한 성과와 희망으로부터 모두 파괴된 잔해더미 한복판에서만 악취를 풍기고, 썩어들어가고 있다. 이보다 더 비극적인 동시에 역겨운 역사적인 광경들도 없다. 그 극장은 현대극을 공연하고자 광분하고 있다. 그러한 극장에서도 하웁트만에 <직조공>, 곧 현대극 중에서도 매우 현대적인 이 작품을 더 자주 공연하게 해야만한다. 그리고 극장감독들에게는 관중석 맨 앞줄을 사민당 지도자들을 위해 따로 남겨두는 건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지도자들조차도 연극을 볼 기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 적응능력들은 한심하고 극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독일 노동계급들에게는 생활수준 하락들을 더는 참을 수 없게 되는 한계들도 있었다. 지배계급 체제는 곧 스스로 생존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기 때문에서 그 한계를 인정할 기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브뤼닝에 긴급명령으로는 형세파악들을 위한 촉수들일 뿐이고, 시작들일 뿐이다. 브뤼닝 정권으로는 사민당 관료들에 비걱합고, 믿을 수 없는 지지에 그저 의존하고 있고, 또한 사민당 관료들은 무산계급들에 대한 일부에 성의 없고 시무룩한 지지들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료적 법령들에 기반을 둔 체제는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고, 일시적이다. 자본주의에는 더 결정적인 다른 정책들도 필요해진다. 자기네 노동자들을 의심하며서 지켜보는 사민당들에 지지로는 자본주의를 유지하는데도 불충할 뿐만 아니라, 이미 귀찮은 거마저도 돼 버렸다. 어중간한 정책들에 시대는 지나갔다. 탈출구를 찾으려면 지배계급이라는 노동자 조직들로부터 가하는 압력에서도 무조건 벗어나야만 한다. 따라서 노동자조직들을 제거하고, 파괴하고, 완전하게 분쇄해야만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파시즘에 역사적 구실들은 시작된다. 파시즘은 무산계급들에 바로 위에 있는 계급들, 그래서 무산계급 대열로 전락하는 걸 늘 두려워하는 계급들로부터 늘 들고일어나게 만든다. 파시즘은 공식정부들에 비호를 받으면서도 금융자본에 돈으로도 그들을 조직하고 무장하게만든다. 그들을 이끌고 무산계급들에 조직들을 혁명적인 조직이든, 보수적인 조직이든, 가리지도 않고 박멸하려만 한다. 파시즘은 보복, 무자비한 폭력, 경찰테러에 체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지배계급 사회 내에서도 무산계급들에 민주주의 요소들을 모두 뿌리채로 뽑은 바탕 위에서 수립된 매우 독특한 지배체제다. 파시즘에 임무로는 우선 공산주의에 대한 전위를 파괴하는데만이 있다는데 있는게 아니다. 노동계급 전체를 강제로 원자화하는거도 있겠다. 이 목적들을 이루고자 한려면 우선 매우 혁명적인 노동자 집단들을 전멸하게하는 거만으로는 택도 부족하다. 독립적이고, 자발적이던 조직들도 죄다 분쇄해야만 하고, 무산계급들에 방어요새들도 모두 파괴해야만 하고, 사민당이나 노동조합들을 지난 75년 동안이나 이룩한 성과들마저도 완전하게 뿌리 뽑아야만 한다. 따지고보면, 공산당에서도 바로 이러한 성과들에 기반들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민당은 파시즘에 승리에도 필요한 조건들을 모두 준비해줬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서 사민당 자신들에 정치적인 청산들을 위한 단계도 준비해왔다. 브뤼닝에 긴급명령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대한 야만행위라는 위험으로부터도 임박해서도 모두 사민당에 책임이라는 말로는 절대로 옳다. 그렇다고 해서 사민당이나 파시즘으로부터 그저 똑같다는 말은 완전하게도 허튼소리다. 



1848년 혁명기에는 자유주의 지배계급들에 정책들은 반혁명이라는 승리를 위한 무대를 준비해왔고, 이 반혁명에 대한 승리로부터도 자유주의는 무력해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라살만큼이나 날카롭게 독일에 자유주의 지배계급들을 비판했었고, 그 비판에 내용은 라살보다도 더 심오했었다. 그러나 라살 지지자들은 자유주의 지배계급들이나 봉건적 반혁명 세력들을 '반동적 한통속'이라고 싸잡아 비난했을 때조차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잘못된 초급진주의에 격분한 건 매우 옳았었다. 라살 지지자들에게는 이런 잘못된 태도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왕정들을 도와주는 구실들을 여러 차례 해왔기 때문이다. 비록 그런 활동들로는 대체로 진보적인 성격들도 있었고, 그래서 자유주의에 대한 성과들보다 한없이도 더 중요하고 영향력도 더 컸지만 말이다. 사회파시즘론으로는 라살 지지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오류를 새로운 역사적인 맥락에서도 되풀이하는거다. 스탈린주의 각료들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이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파시스트 한통속'이라고 치부하고 나서는, 히틀러에 프로이센 주민투표를 지지하는 따위에 할도응로도 앞뒤로 보지도 않고 달려들었다. 이건 라살이나 비스마르크에게도 동맹보다도 나은 건 전혀 없었다. 



현재 국면으로는 독일 공산당들은 사민당에도 맞서 투쟁할 때는 다음으로 같이 서로 다른 두 사실들에만 의지해야만 한다. 첫째로, 파시즘을 강화하게 만든 정치적 책임으로는 무조건 사민당들에게 있다. 둘째로, 사민당 자체로 의존하고 있는 노동자조직들이나 파시즘은 절대로 양립할 수조차도 없다. 현재에 독일 자본주의라는 내부모순으로는 폭발들을 피할 수 없을만큼 긴장상태는 극에 달해왔었다. 사민당도 적응능력들은 한계에 달해서 자멸할 지경들에 이르렀다. 결국 스탈린주의 관료들에게는 오류들도 한계에 달해서 재앙을 맞게됐다. 독일정세에 특징으로는 이 세공식들로부터도 표현할 수 있겠다. 현재에 모든 건 면도날 위로 놓여있듯이, 첨예한 위기상황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대부분 일주일이나 늦게 도착하는 신문들로부터도 독일 상황들을 추적할 수밖에는 없었고, 내 원고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를린까지도 가는데 또 일주일도 걸리고, 그 원고는 소책자들로 출판될 때까지도 몇 주마저 더 걸린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나는 본의 하는게 '모든 건 너무 늦는게 아닐까.' 하고 자문하게 되고, 그때마다 다음으로 같이 말해본다. 아니다.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군대들은 어마무시하게도 커서, 문제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해결될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일 무산계급들에 힘으로는 아직까지도 소진되지도, 될 수조차도 없었다. 그들에 능력들은 아직까지도 발휘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에 논리는 날로 갈수록 더 확연하게 드러날거다. 따라서 해야 할 말들을 덧붙이려는 내 노력으로는 설사로, 몇 주, 곧 한 역사에 한 시기쯤 늦어지더라도 정당하다.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나를 프린키포섬에도 가둬두면 자신들로부터도 일들을 더 조용하게는 끝마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했다. 그들은 사민당에 헤르만 뮐로로부터도 이끄는 정부한테서 '멘셰비크'에게는 비자를 발급하지 않겠다는 약속마저도 받아냈었다. 이 경우로는 공동전선들로부터 구축되는데 동요나 지체마저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소련에 공식출판물에서도 스탈린주의 관료들이나 퍼뜨리는 뉴스로는 내가 사민당들로부터 맺은 협정들에 따라서 브뤼닝 정부를 '방어하고' 그 대가로 사민당은 내 독일입국마저도 허용되도록 영향력들을 행사하고 있다는거다. 나는 그런 악랄한 중상모략들에 분노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어리석음들을 비웃을 뿐이다. 그러나 계속 웃고 있을 수만은 없겠다. 시간조차도 별로 없고, 남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태전개로는 우리들에 입장들로부터 옳았음을 입증해 준다는 거라는 점은 추호도 의심할 수 조차도 없겠다. 그러나 역사는 무슨 식으로 과연 우리들에 올바름을 입증해 줄 건가. 스탈린주의 분파들에 재앙들로부터, 아니면 마르크스주의 정책들에 승리로부터. 



현재들에 모든 문제에 핵심으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건 독일 국민들에 운명마저도 거린 문제지만, 단지 독일 국민들에 운명만이 걸린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책자에서 분석하고 있는 문제들은 어제오늘 생겨난 건 절대로 아니다. 현재까지도 9년 동안이나 코민테른 지도부로부터 열심히 한 일로는 이른바 '총노선'들에 따른 온갖 전술적 소동들로부터도 혁명적 가치들을 쓸모없는 걸로 만들었고, 국제적인 무산계급들에 대한 전위를 혼란에 빠뜨리는거였었다. 소련에서는 좌익반대파들,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로부터 결성될 수 있었던 건 다름아닌 소련에 국내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국제문제 때문이기도 했었다. 그중에서도 독일에 혁명적 상황들에 대한 문제들은 결코 하찮은 거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주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견해 차이로는 1923년까지도 올라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나는 이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여러차례까지 이야기해왔다. 내가 쓴 비판적 저작들 가운데 상당수는 독일에서 출판됐다. 이 소책자는 결국 좌익반대파들에 이론적·정치적 활동들에도 기여해왔었다. 이 소책자에서도 그저 지나가듯이 언급한 많은 문제들은 내가 전에도 이미 자세하게 분석한 바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들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들은 내가 쓴 <레닌 이후에 제3인터내셔널>, <연속혁명> 등을 꼭 참고하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이런 견해들에 차이에 기원들을 훨씬 더 분명하고, 철저하게, 평가하려면, 그걸 또한 중대한 역사적인 문제들로부터도 다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지한 혁명가들, 참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그런 탐구로는 절대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절충주의자들은 사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겨난 단편적·즉흥적 생각들로만 살아간다. 그러나 무산계급들에 혁명들을 끊임없이도 지도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자 간부들에로는 문제나 논쟁들로부터 끊임없이도 계속 연구함으로부터만 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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