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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6 - 박경리 대하소설, 5부 1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평점 :

삶을 살아내다 — 『토지』 16권 / 박경리 대하소설 / 다산북스
지옥 같은 시대, 인간의 양면성
박경리의 『토지』는 지옥 같았던 일제강점기 속에서 여러 인간 군상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나 16권에서는 광복을 앞둔 일본이 저질렀던 극악한 만행을 낱낱이 그려낸다.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이 보이는 '두 얼굴'의 충돌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일본이 조선 민족을 지옥까지 동반할 거야"(33p)라는 송장환의 절망적인 예견 속에서,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한다.
인간의 본성
16권에서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가장 날카로운 통찰은 송영광의 입을 통해서다. 그는 인간이 싸우는 이유가 단순히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본능 때문이라고 말한다.
“재물이나 권력이 한 인간의 생존을 지탱하는 데 얼마만큼이나 필요하겠어요? ... 잘나고 호령하고 지배하고. 그런 걸 위해 권력과 재물을 가지려 하는 거 아니겠어요?" (77-78p)
남보다 잘나 보이고 싶고 짓누르고 싶은 욕구가 사실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78p)에서 기인한다는 분석은 소설 속 악인 조준구를 통해 볼 수 있다. 중풍으로 쓰러진 상태에서도 아들 병수를 괴롭히며 "가학적 쾌감"(268p)을 느끼는 그의 모습은 인간의 본바탕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스스로가 내리는 벌
선혜의 말처럼, 가해자는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상대를 더 집요하게 공격하며, "죄를 짓게 되면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또 죄를 짓게"(89p)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이다.
동시에 작가는 지식인들의 무기력한 양면성도 이야기한다. 서의돈은 "용기가 없는 양심"(161p)이 지식인들의 병이며, 자신을 갉아먹을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억지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어 사용이 금지된 시대, 살기 위해 굴복해야 하는 현실과 마음속 깊은 분노 사이에서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 억압에서 빚어진 습성"(169p)을 지닌 채 위태롭게 살아간다.
시대에 갇힌 삶
박의사의 죽음 앞에서 서희가 느낀 감정은 단순히 슬픈 마음이 아니다.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회피하지 않고 "쏟아놓은 감정을 마치 박의사 가슴에다 주워담아주듯이"(359p) 대했던 자신의 태도를 회상하며 그 시절 그것은 한쪽은 개방되고 한쪽은 밀폐된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401p) 마침내 지난날 어머니와 구천이의 사랑도 이해하게 된다.
길상이 평생을 함께한 가족 앞에서도 왠지 모를 "쑥스럽고 위축되는 것"(406p)을 느끼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관음탱화를 그리며 예술적 구원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어떤 낯섦"(406p)을 느끼는 길상의 모습은 신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길상 자신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
책 속에서 성환 할머니가 아픈 아이를 업고 밤늦게 박의원을 찾아가던 기억(386p)은 어쩌면 어딘가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기에 씁쓸하다. 현실 앞에서도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엄마의 마음. 그것은 거창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려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인간 본성이지 않을까.
『토지』 16권은 가혹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그 고통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유일한 길은?
"마른 땅에 봄비같이 나를 적셔주던 소년"(290p)이었던 길상을 추억하는 병수처럼, 우리 삶을 묵묵히 이어가는 것이 아닐지 생각한다.
"기쁨이란 잠시 쉬어가는 고개요 슬픔만이 끝없는 길"(216p)이라 할지라도,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삶을 살아낸다.
*도서를 제공 받아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용기가 없는 양심...... 오늘날 우리 조선인들, 특히 지식 분자들이 앓는 병 아닐까요?" 서의돈은 새삼스럽게, 또 전에 없이 신중한 태도로 말을 꺼 내었다. "아무것도 되는 일 없고 이룩하는 일도 없고 자기 자신만 갉아먹는 병. 사실 총독부에 폭탄 하나 던진다고 독립이 되겠소? 길가에서 독립만세 부른다 독립이 되겠어요? 그러나 그것은 용기 있는 양심이지요." - P161
가냘픈 몸매, 여름 햇볕에 그을리기는 했으나 야들야들하고 아리송하고 권태스러움이 감도는 얼굴에 구심점과도 같은 붉은 입술, 신기하게도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도 비달실같이 부드러운 게 옛날 그대로였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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