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교회 박영선 목사 설교선집 3
박영선 지음, 조주석 엮음 / 복있는사람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교회란 나의 죄성을 깨닫고 훈련받는 최고의 공간이다"

 

 

(밑줄 친 구절들)

 

 

1. 교회에서 울리는 합창이 처음부터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온갖 사연을 지닌 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처음부터 제대로 된 합창을 할 리가 없겠지요. 의욕만 앞서기도 하고, 각자의 이해관계나 마음속 상처들이 서로를 긁어대어 괜히 더 시끄러워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조용히나 있을 것을, 굳이 왜 모여서 소음을 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그분의 몸이며,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입니다. 우리의 느낌과 판단이 어떻든,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아름다운 합창은 울려 나올 것입니다. - 저자 서문

 

 

2. 교회는 아무 말썽이 없고 무슨 일이든지 잘하며 부끄러움이 없고 자랑할 것이 많은 곳일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란 늘 수군수군하고 빈정거리며, 삐죽거리고 경쟁을 하고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모두가 "나는 떳떳하게 살 것이다, 이만하면 괜찮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와서 주의 일을 하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돈을 내놓으며 봉사하지만 실상은 생색내는 것을 조아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곳이 교회일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가 교회에서 제일 말썽을 부리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놀라는 곳이 교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가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멋있게 이루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착각과 환 상 속에 사로잡힌 신자들이 모여서 "아 바로 내가 사마리아 여인이구나, 바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구나, 나야말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사람이구나" 하면서 자탄과 절망 속에서 가슴 아파하는 회개의 기도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 p. 32

 

 

3. 신자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 그럴 듯한 일을 하고 하나님이 못하시는 일을 도와 드려서 그 일을 완성시키는 보조원이 아닙니다. 신자란 다만 인간이 얼마나 희망 없는 족속이며, 죄로 말미암아 얼마나 처참한 자리에 있고, 냄새나는 죄인인가를 영적으로 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자랑할 것이 없고, 자랑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그 깊이와 아픔을 남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신자입니다. - p. 33

 

 

4.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점점 관중만 늘어 가는 현실이 걱정스럽습니다. 교회에는 오지만, 예베드리고 설교 듣고 헌금이나 하고 도망가는 풍토가 만연되는 것이 걱정입니다. 또한 오늘날처럼 신자가 많고, 오늘날처럼 목사가 많았던 적도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에 교회가 서고, 한 건물 안에도 몇 개의 교회가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점점 대형화됩니다. 왜 점점 대형화가 되는 것일까요? 교회 안에 들어가 깊이 참여하는 것은 싫고 뒤에 앉아서 몰래 구경꾼이 되고 싶기 떄문입니다. ...... 그러나 신자는 이런 식의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해 보아야 합니다. 울어봐야 합니다. "내가 이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구나"하며 자기의 밑바닥을 바라보며 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지 절실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주를 닮아가는 첫 걸음을 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p. 34, 35

 

 

5. ......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그가 가는 길이나, 주변 상황이 만사형통하는 축복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건강하고, 예수 잘 믿으면 복을 받으며, 예수를 믿으면 뭐든지 잘된다는 식의 생각은 사실 기독교적이 아닙니다. - p. 66

 

=  기복신앙, 힘의 종교, 능력주의, 성과주의, 은사주의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신앙에서 '부'지 '주'가 아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위해 죽어가는 종교, 희생/헌신하는 종교,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듯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주신것처럼, 밀알이 되는 종교, 아버지의 마음, 상한 심령을 가지는 것

 

his unconditional loveㅡ.

 

 

6. 우리는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억눌린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기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를 억누르고 고통스럽게 한 자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 p. 6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의 이웃도 사랑할 것이니"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라"

 

 

7. 기독교는 아무리 교인 수가 늘어난다 해도 세력이나 힘으로 세상 앞에서 진리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핍박당하는 것으로 증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힘으로 증명하려다 망한 중세를 기억하십시요 - p. 61, 62

 

=  힘이 아니라 성품으로, 그리스도의 향기, 빛과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

 

 

8. 사실 성경에는 전도하라는 이야기가 마태복음 마지막 장과 사도행전 첫 장, 그리고 디모데전서에 한 번씩 나옵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물론 간접적으로 더 있을 수는 있습니다. 중요한 건 서신서를 보면 전부 교회론, 성화론에 관한 것이지 전도에 관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 p. 41

 

 

9. 우리는 자꾸 큰일을 하려고 합니다.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하고 남이 못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 매일 허락된 일상생활, 여러분의 가정을 지키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 속에서 수많은 작은 일을 겪으면서 성숙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 p. 47, 51

 

 

10. 좋은 교회는 교회안에 말썽이 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이 모인 곳이므로 당연히 말썽이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어떻게 견디어 내느냐에서 교회의 건강이 판가름 납니다. - p. 109

 

 

11. 세상은 실패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남이니까) 세상은 두번의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일흔 번씩 일곱 번 기회를 주는 곳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나의 생각)

 

 

교회는 언제나 문제가 있는 곳이다. 병원에 환자만 모이듯, 당연히 문제있는 사람들만 모이니 항상 일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니 이제 그만 비판하여라. 그렇게 비판하는 너는 도대체 교회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노력이라도 해보았는가? 모두가 교회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손가락질 하기바쁘다. 누구도 직접 그 공동체에 들어가서 아픔을 나누려하거나 헌신하려,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아무도 문제와 씨름하려하지 않으려 하고,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고 그냥 주일예베만 내 편한대로 훌쩍 드리고 가기 일쑤다. 왜? 귀찮아지니까.

 

 

말만하는 믿음은 결코 올바른 믿음이아니다. 말은 되도록 줄이고 도리어 묵묵히 행동해라.

우직하게 내 자리를 지키는 것, 내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 내 자리에서 나의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것이 성숙의 길이며 주님이 내게 원하신 (평생 추구해야할) '성화의 길'이다.

 

* 교회 : 가족 공동체, 한 몸, 하나됨, 내 몸과 같은, 결혼이 두 영혼의 하나됨이라면 교회는 공동체적 하나됨이다.

함께하는 것,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함께 떡을 떼고 마시며 일하는 것, 하나님이 꿈꾸는 바로 그 이상적인 공동체

 

* 교회의 4 실천요소 : 말씀, 교육, 교제, 활동 // 하지만 그 모든것들보다 가장 중요한것이 바로 말씀중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기초가 되지 못하면 그 기타 모든 잡스러운 것들은 꽹과리에 불과하게 변질될 뿐이다.

본질을 잊으면 안된다. 교회는 말씀을 가르쳐야하고, 그것을 날마다 강해하고 전해야한다. 그것이 첫째다.

 

 

정말 위대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며 세상에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그렇게 조용히 사라진, 죽어간, 이름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진정 위대한 사람들이다.

 

- 예언자들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짐)

- 세례요한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예수님 (십자가에 매달리심)

 

유명해졌다는 것은ㅡ, "너는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

 

http://blog.naver.com/917ph/1402115884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꼭 한번쯤 포스팅하고 싶었던 책이다.

http://blog.naver.com/917ph/220171141710 

 

< 피로사회 >

 

 

- 자본주의는 분명히 절대적가치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기자신은 여기에서 교묘히 제외시킨다. 즉, 들뢰즈가 말했던 바로 탈영토화 이후 재영토화를 말한다.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던은 모든것을 해체시켜버렸다. 그리고 그 모든것들을 자기 자신들로 대체시키도록 보이지 않게 강요했다. 지금 세계는 모든 사람들, 문화들을 존중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기준이 있다. 누가 아프리카의 가나와 미국을 사실상 동등하게 보겠는가? 뭐든지 인정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Nudge가 있다. 잘생긴사람, 부자, 가진자, WASP 등 이 안에서도 주류가 엄연히 존재한다. (코드화, 영토화) 우리는 이들을 숭배하게끔 세뇌받는다. 그래서 비주류, minority, 배제된자들, 가난한자들, 장애인, 노인들조차도 모두가 다 '잘생겨지고'(상징적의미) 싶어하게 된다.

 

- 우리가 언제 가장 행복했었는지 떠올려보라, 지금 시대는 갈수록 파편화된, 찢겨진, 개인, 부품화, 도구, 소외 그로인한 외로움, 우울증, 무력감 등등 이미 교과서에도 이것들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이라고 몇십년도 더 전부터 기록되왔었다.

 

- 자유를 위해 공동체, 사회, 절대적인것, 보편적인것을 대가로 치룬 결과

- 지루함, 답답함, 권태, 쳇바퀴, 정해져있는, 주어진 문화, 보이지 않는 강요,

  의지할곳이 없이 내던져짐(극단적자유)

 

p32.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Attention)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Hyper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의 심각한 개인화에 따른 (골방주의, 방콕, 칩거 등) 절대고독 등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이 사색을 한다. 그러나 역시 공적인 자리에서 보여지는 것은 활동적 삶으로 제한된다. 공적인 분야에서 연애(섹스), 스포츠, 드라마 이외의 것을 주제로 담론을 가지려 한다면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현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즐기라고 허용된 것만 많은 것을 즐길 수 없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한다. 물질적 풍요로 사람들의 눈과 코와 귀를 막는다. 마치 힌두교에서 말하는 마야(Maya, 사물의 본질을 볼수 없게 흐리도록 하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의 총체)와 같은 형태를 띈다. 현대사회는 인간을 동물로써 사육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점차 느긋하게 완성되어 가고 있는것이다.

 

p.41.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도무지 참을 수 없다, 이 존재의 가벼움을)

 

p 43.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p 50.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 생각할 수 있는 힘의 상실은 곧 자유의 상실을 의미한다.

 

p 72.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에덴의 시간, 노장사상)

 

p 91. 우울증 환자는 무형적이다. 그는 성격없는 인간이다. (기계부품, 도구)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고 어떤 역할이나 기능도 수행할 수 있는 유연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형성 내지 유연성은 높은 경제적 효율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기능성만 뽑아서 사용하는,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서, 정글)

- 모든것 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 사람의 인격자체가 배제되는 상황

 

"그 사람이 누구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그가 일을 잘하냐 못하냐이다. 심지어는 인간관계도 이젠 일을 '잘하냐 못하냐'에 속하게 되버렸다. 아무리 화가나도 기능성을 위해 누구와도 잘 지내야한다"

 

p 96.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p 97. '주도적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 있는 것이다.

 

p 103.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이것이 거의 자본주의의 최종 완성의 단계이다, 자가착취) 이상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loser, 패배자)로 나타난다. (이는 동시에 조급증을 유발한다-지금 나의 현 상태)

 

p 128. 그러나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허상, 완벽히 자유로운 자는 혼자다. 도구이자, 부품이다. 그러기위해서라도 민주주의는 필요했다.

 

- 개인은 평등하지 않게 태어난다.

- 개인은 완벽한 자유에 따른 완벽한 책임을 등에 이고 살아야한다. 평생토록! (자유로부터의 도피)

- 사람은 결국엔 누가 이끌어 줬으면 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 사람들이 서로를 도구 이상으로 느끼지 못하게 됨

 

"사색할 수 없게 만드는게 무엇인가? 그게 바로 1984의 세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이 시대의 패러다임, 시스템, 매트릭스에 관하여, 外 자본주의가 무너질 수 없는 이유 >

 

 

 어째 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는거 같다. 고대 노예시대부터 산업혁명이 발발한 자본주의 태동기, 그리고 지금 정보화와 포스트모던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지금까지 역시 비참한 인생들은 늘 그렇게 존재해왔다. 그들에게 대체 프롤레탈리아 혁명이니 노동자를 위함이니 따위가 무슨 소용이었나? 그들은 관심조차 없었다. 다만 힘을 가지지 못한 지식인들이 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명분을 이용했을뿐...(물론 진실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것이다)

 

 나는 느낀다. 이제 조만간 보이지 않는 광풍이 불어올것이다. 너무 모든것이 미쳐돌아가고 있다. 나 조차 간신히 과거를 되새기며 현재를 종합하고 있는데, 너무 빠르다. 지금이 바로 패러다임의 전환기이다. 정규분포의 끝자락, 혼돈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마치 자본주의 태동기의 폭발적인 생산성으로 인한 극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지금 현대의 정보화물결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모든 사람들처럼... 현대판 춘추전국시대... 모든것이 재편되는 시대... 군웅이 할거 하는 시대다. 누가 패권을 잡을지는 모르나, 한가지 확실한것은 그 모든 피해는 약자들이 지게 되어있다는점이다. 지금 모든 나라가 돈을 정말 말도 안되게 풀고있다. 왜 돈을 푸냐면 일차적으로는 경기부양이겠지만 이차적으로는 상대나라를 조지기 위해 푸는것이다. 돈을 풀면 상대나라는 가만히 앉아서 가치를 뜯기게 되니까 말이다. 지금 이시대는 칼로써 하는 전쟁이 아니다. 돈으로써 화폐로서 하는 보이지 않는 지적인 두뇌전쟁이다. 금리와 환율조작으로 상대에게 어퍼컷을 날리는 시대다. 그러니 서민들만 치솟는 물가에 보이지 않는 착취를 당하는 구조가 현 자본주의인것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절대 없어질수는 없다. 왜냐면 이것은 인간본성과 너무나 밀접하게 맞물려있기 때문이고(힘의논리가 이렇게 교묘하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난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자본주의 산업이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쪽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진다. 마치 기계처럼!(부품하나가 작동을 멈추게 하는것처럼, 미국의 금융위기가 유럽의 재정위기를 촉발하고 또 이것이 다른위기를 촉발시키겠지...지금 땜빵식으로 돈을 막대하게 풀지만 오히려 이럴수록 상처는 곪을 뿐이다. 위기를 초래하게 했으면 그 대가를 치뤄야 한다. 이 유동성 장세는 오히려 장기 불황을 유발할 뿐이다. 그리고 항상 구조조정을 단행하면 그 희생양이 되는건 일반 백성들이지 언제나... 위기를 일으킨놈들은 지들이 일으켜놓고 세금으로 복구하면서... 뭐 나라가 망한다느니 뭐니하는 선전성문구를 남발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미 우리가 자본주의에 찌들어있다. 거의 우리 모든 세대가 자본주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것들이 너무나 익숙하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계가 금본위제가 폐지된 시점부터 이미 사기라는걸 모른다. 돈의 본질을 모른다. 진짜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딱 들어맞는말,

 

'이 세상의 모든것은 구라위에 존재한다'

 

 파스칼도 왕권의 신성함이 거짓위에 존재한다고 했다. 마치 왕도 똥을 싼다는것처럼 우스꽝스럽다는걸 백성이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것이 권력의 핵심이니 말이다... (사실 이걸 아는 백성도 있지만 프롬의 '자유로부터도피'처럼 백성이나 군중이나 대중은 누군가가 스스로를 학대하길 바란다. 참으로 오묘한 본능이다. 아마도 이건 누군가를 숭배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비뚤게 나간것일게다...하나님을 숭배하는것에서 어긋난 본능...)

 

 

어쨎든 이 모든것들을 다시 되돌리고 옛날로 돌아가자고 혼자서 외칠수 있는가? 누가 당신말을 듣겠는가?

그리고 설령 듣는다하더라도 그게 가능하겠는가?

 

되돌릴순 없다. 자본주의가 멈춘다면 세계는 돌아갈수가 없다.

 

이것은 피할수 없다.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매트릭스를 이길수 있는 진리의 빨간약은 대체 무엇일까?

예수님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논리일까? 거래가 아닌, 비즈니스가 아닌, 보드리야르의 선물의 논리인가?

내가 죽고 남이 사는, 한알의 밀알이 아무 대가없이 떨어져죽어서 열매를 맺는것인가? 희생의 논리인가?

 

 우리는 반드시 욕망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돌아간다. 반드시 욕망을 자극해야 수요가 발생하고 그래야 돈을 쓰고 경제가 돌아간다. 이미 오래전부터 욕망을 긍정하는 들뢰즈의 철학이 이것을 예고했었다. 우리는 대체 이제 무엇을 더 욕망해야 하는가? 이제 새로움자체도 지겹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 창조성에 대한 집착도 토할것 같다. 이 미친 자본주의는 대체 어디까지 성장해야 이 광기를 멈출것인가?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점점 더 삶은 비참해진다. 우리나라도 모든게 부숴지고 있다. 해체되고 있다. 가족이 교회가 학교가 모든 곳에 힘의논리가 없는 곳이 없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 자신까지 붕괴시키면서 성장하려한다. 자신의 인간성이나 부모자식까지 제물로 삼아서... 이건 마치 파우스트와 같은 악마의 계약이 아닌가? 힘을 얻기위한 악마의 계약...

 

 피로사회처럼 이제 스스로착취 자가착취하는 시대까지 왔다. 성공신화, 긍정적인것까지 예술, 철학, 심지어 인문학까지 상품화 되었다. 이제 더 상품화 할것이 남긴 한것일까? 상품화 할게 없으니 당연히 청년 실업자가 늘고 선진국 경제가 침체되는게 구조적으로 피할수 없음이 분명하다. 유럽을 봐도 벌써 극우가 모습을 점차 드러내고 있다. 모든 사회가 불만에 차있다. 선진사회 청년들 대부분이 자기는 부모세대보다 미래가 암울할것으로 스스로를 점치고 있다. 자살률과 저출산율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것의 결과다.

 

 상품화 할것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 따라서 이제 거의 끝자락까지 왔지만 조금더 지속될것이다. 아직 중국내륙과 아랍권 그리고 아프리카와 같이 개발안된곳이 있으니... 그러나 그곳들마저 모두 개발이 된다면 이제는 정말 주님이 오실 차례신가?

 

 

 

< 21C의 시대정신 : Capitalism, Technology, Mass Media >

 

 

 

"자본은 생산성을 부추기고, 기술력은 미디어를 타고 더 큰 파급력을 가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연초에 영미권에 폭풍적인 관심을 얻은 책 'Sapiens'이다. 아직 국내에는 출간되지 않았지만 정말 섬뜩하리만치 무섭다.. 이렇게 과학과 기술은 미친듯이 달려나가고 있는데 아직도 경제-정치제도, 심지어 종교도 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마치 산업혁명 시대의 초기를 보는 것 같다. 그 당시 처음으로 인류가 농경문화에서 탈피하여 산업화를 통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 힘을 컨트롤 하기에 인간은 너무 미숙했고 결국 넘치는 힘의 포화로 세계 1, 2차 대전을 발현시켰다. 그리하여 전 세계는 온갖 학살과 노예화, 제국주의와 식민지, 폭력과 전쟁이 휘몰아친 니체의 말대로 정말 '미친 광풍'이 20세기를 강타했었다.

이제 21세기에 들어서 다시금 그런 시대의 격변기로 접어든 것 같다. 컴퓨터-인터넷-스마트폰 혁명으로 인해 무선-디지털화는 더더욱 가속을 받고 있다. 정보화 혁명이 이뤄낸 엄청난 성과를 따라잡지 못하는 인류의 사고와 지능은 이제 도태되는 것인가? 나는 솔직히 말해 조금 무섭다. 지금 기술자들, 엔지니어들과 기업들은 서로 협력하여 인간이 넘어서는 안되는 선까지 넘보는 상황이다. 그들은 거침이 없다. 무엇이든 이뤄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막강한 자본력으로 세계 석학들을 끌어모아 그들만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한다.

이 정도 속도라면 (그리고 앞으로 더더욱 빨라질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던 것들이 현실화 되는 것은 머지 않을 것이다. 줄기세포와 인간복제/교배, 유전자조작과 나노기술을 통한 새로운 변종 생명체 설계(키메라와 같은, 이와 같은 것들로 얼마든지 군대를 조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빅데이터를 집약한 거의 인간과 구분이 불가능한 인공지능,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인간과 기계를 접목시킨 사이보그, 무선통신으로 연결된 RFID와 온갖 뇌과학, 심리학으로 점철된 가상현실- 현재 여기에 가장 앞서나가는 것이 포르노산업이다- 등등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들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드디어 인간은 자연을 넘어서 인간 그 자신을 스스로 변형시키는 사태까지 초래한 것이다. 모든 인간성도 (인류 역사상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고 유지되 온 것들도) 얼마든지 우리 원대로 바꾸고 조작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우려하던 '인간개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내가 죽고 난 직전쯤인 2080~90년도에는, 내 자식들과 손자들이 살 세계가 바로 이런 세상이다.

이렇게 세상은 엄청난 기술문명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데 아직도 기독교 지성인들은 그리고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너무 Naive한 사상과 생각 속에 갇혀 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히틀러를 찬양한 독일 루터교처럼 시대조류에 휩쓸려 당시 자유주의 신학처럼 기독교의 토대와 뿌리 자체가 뜯겨나가는 상황을 다시금 경험할 것이다.

엄청난 힘을 소유하게 된 현대문명은 이제 그 넘치는 힘을 통제하지 못하여 또는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에 관한 그 어떠한 방향성도 상실한채 표류하기 십상이다. 그것이 나아가야할 가이드라인을 누가 제시할 것인가? 무제한적 자유는 결국 루이스의 <인간폐지>에서 언급된 것처럼 다시 자연으로 귀속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더이상 ought가 아닌 오로지 want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은 벌써부터 이것에 대해, 이런 세상이 올 것에 대비해 신학적으로, 진화-생물학적으로 끊임 없이 공부를 하고 계신다. 앞으로 뇌과학, 행동심리학, 테크놀로지의 시대가 올 것은 이제 자명하다. 이 학문들을 공부하지 않고 금시대를 논할 수 없다. 그래도 이런 분이 계시기에 나는 희망을 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현대문명은 넘어서는 안되는 한계까지 넘보고 있다. 인간은 반드시 그 선을 언젠가 넘을 것이다. 왜냐면 인간은 하지말라는 것은 더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기어이 하고 말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많은 악과 부조리와 비극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아마도 모든 것에 완벽한 해답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선하고 전능한 신이 계시다면, 차라리 신이 없다면 아무 문제꺼리도 되지 않았을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필요성은 있어 보인다. 그 누구도 아닌 제일 먼저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러하다.


 신정론(theodicy, 神正論)  : 인간 실존과 하나님에 대한 문제


 

 최근 새물결에서 정말 좋은 책이 나왔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뛰어난 신학자가 있음에 나는 너무 감사하다. 이 분 내력을 조사해보니 특히 이쪽 변신론, 신정론 쪽에서 가장 알아주는 분이시다. 책 안에서도 밝히지만 자신이 왜 이 한 문제에 대해 끝까지 파고들었는지는 결국 그의 인생과 삶에 관련되어 있었다.


 누구나 이런 상황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나도 이런 당혹스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처음으로몰리게 된 것은 내 친할머니가 쓰러져서 병원에 버려졌을 때다. 그래서 그 당시 몰두했던 학문도 자연스레 실존주의적 철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쓸모있었던 철학이라 생각했다) 그 당시 기록을 해둔 게 있어서 참 다행이다.



 "

나는 내 어린시절을 거의 할머니와 보냈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직장생활을 하셔서 나는 할머니와의 추억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지금 할머니는 양로병원에 계신다. 정말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할머니는 신앙이 굉장히 좋으시다. 언제나 할머니 중심으로 내가 16살까지 단 한번도 매일 가정예베를 거르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 할머니는 왜 그렇게 계신가? 자식들도 다 내팽게치고 그렇게 외딴곳에서 홀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외로움속에 혼자 계신다. 간호사도 (나는 돈으로 엮인 관계는 믿지 않는다) 그 쓸모없는 존재를 뒤치닥거리 하는게 역겨울 것이다. 물론 우리가 방문할 때면 밝은 미소로 맞아주지만 우리가 없을 때 할머니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나는 안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될까? 나도 나중에 늙으면 내 친구들도 다 죽어가고 더이상 소통하고 대화할 사람도 없이 저리 비참하게 죽어갈까?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것이 정신적 고통이다. 나는 안다. 늙어서도 사람의 영혼은 똑같다는 것을, 다만 껍데기만 쭈글쭈글해진다는 것을... 사람들의 눈빛이 나를 버려버릴 쓰레기로 본다는 느낌을... 그래서 할머니는 내가 가서 손을 꼭 잡아줄때마다 우신다. (치매 비슷한 것도 있으셔서 말을 잘 못하신다) 그냥 하염없이 우신다.

 

내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 대체 왜 이따구냐고, 할머니를 사랑하는게 맞냐고, 대체 왜 우리를 만들어서 이리 비참한 곳에 쳐박아 버리냐고! 돌아가게 하시려면 빨리 돌아가게 하시던가, 아니면 할머니의 건강을 좀 어떻게 해주라고... 나는 더이상 할머니의 모습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물론 나도 할머니가 천국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그 광경을 목격할 때면... 마치 다죽어가는 사람에게 성경주면서 '천국가세요!'라는 그런 무의미한 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오직 친척중에서 우리 부모님만 할머니를 모신다.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바쁘셔서 최근에는 또 자주 못가신다. 나는 가슴이 찢어진다. 그러나 더 웃긴건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마음한구석에선 '아무리 할머니가 저러셔도 나도 내인생을 살아야지...' 라는 이기성이 고개를 쳐든다.. 나 조차도 쓰레기다.

"



 이 당시가 2010년이니 벌써 5년이나 지났지만 할머니의 상태는 오히려 더더욱 악화되었다. 심지어 간병인이 일부러 할머니를 때려 넘어뜨린 바람에 정강이가 부러져 대수술을 받고 이젠 거의 반 식물인간 상태시다. 모든 친척들도 할머니를 병원이란 감옥에 쳐박아둔채 버려진 쓰레기처럼 취급하고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다. 아니 아예 있었던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여전히 처참한 고독속에서 하루하루를 끔찍하게 연명하고 계신다.


 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건 병문안 가도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압도한다. 좌절감, 죄책감, 절망이 나를 미치게한다. 그저 눈물만이 눈가에 아른거릴 뿐이다. 차라리.. 차라리 하나님이 빨리 데려가셨으면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이렇게 인간이 존재하는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할머니를 보고 어머니는 내게 '너는 내가 이렇게 되도 절대 병원에 데려가지 말아다오'라며 간곡히 당부하신다. 그냥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이렇게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붓다가 정확히 보았다. 신이 없는 인생은 그저 생로병사요 평생을 생존에 고군분투해야하는 정글이자 치열한 전투이다. 많은 철학자가 이를 설파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이에 대해 온갖 해답을 내놓으려 애썼지만 결국 3,000년전이나 지금이나 바뀐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신을 믿는, 그것도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작년 대한민국에 세월호참사가 일어났다. 40여년전에는 베트남전쟁이 있었으며 50년전에는 스탈린의 대학살,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이 있었다. 그보다 더 전인 70여년전에는 아우슈비츠가 탄생했다. 20세기만해도 이 정도이다. 더 열거하기도 벅차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수용소에선 탈출하려는 임신한 여자를 배갈라 난도질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진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정녕 그렇게 창자가 터져 죽기 위해 태어났단 말인가?


 이것이 인간의 부정할 수 없는 실존이다. 나도 어쩌면 저렇게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고통받으며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 형제들> 대심문관 편에서 차라리 그럴바에 빵을 줄 것이지 왜 이토록 나약한 인간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냐고 예수에게 따진다. 이 책에서는 이와같은 질문들 즉, 전통적인 기독교 신정론이 놓친 바로 그 맹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간단히 먼저 정리하자면


 A.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는 고난, 고통, 역경 : 전통적 해석

(베드로사도의 말처럼 이기지 못할 시련을 주시지 않으신다)

   a-1 : 인과응보에 따른 심판적 성격

   a-2 : 새끼 독수리를 절벽으로 내모는, 강하게 훈련시키고 단련시키는,

           감독이 선수들을 지옥훈련 시키는 성격의 훈계적 성격

   a-3 : 특별한 하나님의 불특정한 뜻에 의한 개입적 성격


 위와 같은 성격의 고난은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에서 거의 할 수 있는 모든 통찰을 담아놓았다.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이해되는 설명이다. 이런 류는 오히려 사람을 성숙하게 하며 타인의 아픔까지 공감할 수 있는 원천이 된다. 그리고 그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서 더욱 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내가 내 욕심에 따른 기복적이고 거래관계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 것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게 해주는 중요한 도구로서의 역할도 존재한다. (진정한 사랑은 모든 상황이 악조건이고 더이상 바라볼 것이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를 신뢰하며 주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려는 순수한 의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스 마저 조이를 잃고 자신이 그 책을 쓴 것을 후회한다하며 나온 <헤아려 본 슬픔>은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고통이다. 그 뛰어난 지성의 루이스 마저 하나님을  '인간을 쥐처럼 가둬두고 생체실험 하는자인가?' 또는 '그 작자는 사탕을 빼앗고 사탕을 먹고 싶지 않을 때가 되서야 다시 사탕을 주는 사디스트인가?'라며 분노를 표출한다. 이것이 바로 다음 유형이다.


 B. 하나님이 전혀 원치도 않으시고 직접 주시지도 않은 고통

- 어린아이 : 며칠전 네이버에도 12살짜리 아이를 7kg까지 굶기고 학대해 죽인 사건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까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단 한명의 어린이라도 고문을 당한다면, 과연 하나님이 자신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극단으로 내몰린 상황 : 예를들면 30년간 아내를 간호하다 그 정신적 고통에 못이겨 자살한 사람, 극단적 고문에 배교한 신자, 아우슈비츠, 세월호 등등..

- 광범위하고 파괴적인 자연재해, 질병, 죽음


 바로 이러한 성격의 고난을 단지 모두 신의 뜻이고 섭리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욥의 친구들처럼 내 일이 아니니 그냥 쉽게 생각하며 시끄럽게 하지말고 받아들여라, 잠잠하라(서초역에 큰교회 목사인걸로 알고 있다)라며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주지는 못할 망정 이들을 코너로 몰아간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력히 변호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 (p.103) 그리고 함께 슬퍼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였고 인간이 올바르고 행복하게 살길 꿈꿨는데, 인간들의 죄악성으로 인해 어그러지고 찌그러진 세상을 보며 하나님이야 말로 가장 아파하며 가슴이 찢어지시며 통곡할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 고난에 자신이 참여함으로서,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 이를 몸소 보여주셨다, 이를 극복하게 하고 헤쳐나가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으로 악을 선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이지, 선으로 승화시킬려고 일부러 악을 만드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거야말로 정말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런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웃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바울의 말처럼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상대방의 고통을 내 일 처럼 여기며 그저 말 없이 묵묵히 옆에 있어주고, 또한 고난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 혹은 악한 사회구조, 제도에 대해 무관심하게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한다. 크리스천이라면 꼭 한번 누구나 일독하기를 권한다.

 

http://blog.naver.com/917ph/2203693507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샴고로드의 재판
엘리 위젤 지음, 하진호.박옥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트 또는 흑야로 유명한 엘리 위젤의 희곡이다. 예전부터 위젤의 책들을 읽고 싶어도 국내에 발간된 것이 많이 없어서 아쉬웠었는데, 포이에마에서 오랜만에 좋은 책을 낸 것 같다. (요즘 이 출판사를 매우 눈여겨 보고 있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삼고로드란 마을의 여관주인과 웨이터 마리아, 연극악단 유대인 3명과 개신교 성직자가 신을 피고로 세우고 신을 재판하는 내용이다. 여관주인은 신의 유죄를 묻는 검사 측을, 그리고 어떤 한 젊은 나그네는 모두가 떠넘긴 신을 옹호하는 변호사 측을 맡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신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는 주인공 여관주인이다. 이 사람은 그 사건이 있기전 매우 경건한 유대인이었으며 언제나 신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술집에 놀러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 그는 그의 아내와 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무리들이 마을을 약탈하고 유대인 살육을 시작했다. 그는 술집의자에 묶인채 자기 아내와 딸은 침입한 강도들에게 집단으로 강간을 당하는 모습을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는 울면서 절규하며 신에게 부르짖는다.


 '주여 우리를 제발 구원하소서!'


 그러나 신은 어디에도 없었고 오로지 무거운 침묵만이 주인공을 맞는다. 그러는 그를 보고 약탈자들은 크게 비웃는다. 결국 저항하다 아내는 무참히 살해당했고, 딸은 정신병자가 되어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삼고로드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버렸다.


 그는 생각한다. 왜 신은 그 상황을 그저 지켜보면서 방관하였는가? 그는 우리를 분명히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우리가 고통에 차 절규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디스트인가? 여관주인은 더이상 웃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냉소와 하늘을 향한, 신을 향한 맹렬한 분노뿐..


 여기서 바로 젊은 나그네가 등장한다. 이 사람은 매우 침착하며 감정이 없는, 그리고 날카로운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사람이다. 그는 여관주인의 모든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궁지에 몰아넣는다. 방청객인 다른 유대인들조차 이제 이 나그네가 신의 대리인이라고까지 하며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을 옹호하는 바로 그 젊은 나그네의 정체가 사탄으로 밝혀지며 막이 내린다.


 작가는 아무리 인간사의 모든 부조리와 비극이 비록 그것이 온갖 현학적인 설명으로 논박이 가능하더라도 그 인간의 비통한 심정 자체를 공감하지 못하는 비인간성이 바로 사탄이라고 정의한다. 슬픔과 비탄에 빠진 사람에게 욥의 친구처럼 이것저것 잣대를 들이대며 괴롭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말보다는 그저 안아주고 위로와 공감해 주라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을 갖다붙여도 설명이 가능하고 논리적으로 논박이 가능하다. 일차적으로 그 죄는 강도가 저지른 것이지 신이 저지른것도 아니며, 신의 뜻도 아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또한 그들은 사실상 신이 복을 줄때만 나에게 의미있는 신이라는 실용주의의 신, 기복신앙의 신일 뿐이다. 잘 생각하면 그것은 댓가의 신이며 거래의 관계이다. 신은 진정한 사랑,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그것이 자신에게 '전혀 유익이 없더라도 나를 사랑하느냐'와 같은 사랑을 바라신다. 마치 저 여자가 나의 돈과 힘을 사랑하는 건지 혹은 저 남자가 나 자체보다 내 외모와 껍데기 육체, 몸매만을 원하는 건지 의심하고 고민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기독교의 신은 가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미친 명령까지 한다. 너가 그 어떤 것보다 심지어 너의 가장 사랑하는 100세 이후에 가진 첫 네 소생까지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하느냐?


 비신자들이 볼때는 이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짓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너의 어미와 친척 형제들 싹다 버리고 나만 따르라고 예수가 명령한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참 행복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가족보다도 더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버리면 모두가 죽지만 내가 진리를 받아서 내 가족까지도 진리로 이끌면 모두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절벽으로 달려가는 가족들을 말리려면 내 말을 들어야 한다'와 같다. 그들을 사랑하기에 오히려 그들을 먼저 버리라는 모순적이지만 역설적인 진리를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신이 가끔씩 우리 인생에 작은 일에도 개입하는데 왜 저렇게 절박한 상황에서는 있지도 않은 듯,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아무 개입이 없냐고 한다면 무어라 할 것인가? 그럼 신은 자기 맘이 가는대로 개입하기도 하고 비-개입하기도 하는 변덕쟁이란 말인가? 그러나 신은 기계의 사랑을 원한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했고 그것에 따른 필요악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그런 논리라면 우리가 죽을때도 왜 우리를 죽게했냐고 따지거나, 세월호가 침몰할 때마다 신은 그것을 막아야하며 심지어는 '세계대전을 왜 안막았습니까?'처럼 끝없이 따져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도 신을 완벽히 유죄로 몰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리고 신은 또한 우리의 믿음과 단련을 또는 믿음의 시험을 통해 더욱 굳건해지도록 우리에게 고난을 주기도 한다. 혹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채찍이나 사랑의 매일 때도 있다.


 자, 그러면 실제 저런 상황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내가 그 사람 앞에서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것이 신의 뜻이니 잠자코 받아들이라며 그를 몰아붙여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 고통과 역경과 부조리와 비극을 직접 맞은 사람에겐 그딴 소리가 얼마나 다 헛소리고 개소리로 들리겠는가? 나같아도 누군가 그렇게 군다면 오히려 더더욱 그 사람과 신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 커져갈 것이다.


 나도 이렇게 머리로는 그저 머리와 짱구로는 다 납득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내가 저 상황에서 정말 나는 그렇게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게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욕하고 저주하며 온갖 분노를 표출했을 것이다. (주여 그저 나약한 나를 붙드소서! 나약한 우리 인간을 용서하소서)



 저명한 소설가 조성기의 야훼의 밤에서는 주인공이 사랑하던 여인이 선교하러 선교지에 갔다가 흑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정신질환을 앓고 귀국하게 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위젤의 나이트에서도 아우슈비츠 교수대에서 목이 졸려 바둥바둥대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말한다.


'하나님은 어디있는가?

'도대체 우리의 하나님은 어디있는가?'


(심지어 그 아이는 어린아이라 가벼워서 오랜시간 뒤에 혀가 흘러내리며 죽었다)

- 이후 이 광경을 목격한 위젤은 완고한 무신론자로 돌아선다.


 

 이 모든게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만약 당신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당신 자식이 저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본다면? 혹은 내 딸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간 선교지에서 집단강간을 당하고 미쳐버린다면? 당신은 과연 당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한번 당신 마음에 물어보라 우리가 만약 삼고로드의 여관주인이라면 우리는 과연 그래도 신을 꾸준히 사랑하며 '신은 숭배받기 합당하신, 지당하신 분이시다! 그를 찬양하여라'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욥의 친구들 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저 여관주인에게 온갖 신학적 논리와 이성적 판단을 들이대며 신을 원망하는 그를 나무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당신이 저 상황에 처한다면 당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옳다며 정당화 시킬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당신이라면 저 필리핀 소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줄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필리핀 방문 마지막 날인 18일 마닐라 산토토머스대를 찾았다. 그곳에서 교황은 청소년들과 대화를 하다가 12세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울면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이야기하다 문득 교황에게 물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마약과 매춘에 내몰리고 있어요. 신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거죠? 왜 우리를 도와주는 어른들은 거의 없는 건가요.”

 

 질문을 받은 교황은 소녀를 안아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AP통신은 “교황은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며 “교황은 미리 준비한 영어 연설을 하는 것도 포기했다”고 전했다. 교황은 시간이 지난 뒤 대중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소녀는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유일한 사람이다.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 마약을 먹는 아이들, 집이 없는 아이들, 방치되고 착취당한 아이들, 사회가 노예로 쓰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 우리가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